[유신모의 외교 포커스]‘동평구’ 박근혜 정부의 슬로건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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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유신모의 외교 포커스]‘동평구’ 박근혜 정부의 슬로건 외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3. 3.

박근혜 정부 대외정책 기조의 특징은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향하는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 목표에 도달할 것인지가 생략돼 있어 정책이라기보다는 구호나 결심(resolution)에 가깝다.

최근 청와대가 띄우고 있는 ‘통일 대박론’은 통일 방안과 통일 이후 사회 통합의 지난한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유라시아 역내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한다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비현실적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역시 북한의 좋은 행동에 대해 보상하고 나쁜 행동은 응징한다는 것이 본질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채찍과 당근’식 접근법과 다르지 않다. 굳이 다른 점을 찾아내라면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채찍과 조금 더 큰 당근’을 들었다는 것 정도다.

집권 2년차의 박근혜 정부가 이번에 들고 나온 슬로건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줄여서 ‘동평구’라고 부른다. 지난 1년간 가다듬고 살을 붙인 동평구는 이제 국제적 공감대 확산을 위한 세일즈 과정에 돌입했다.

지난주 이경수 외교부 차관보가 이끄는 정부 대표단은 미국 워싱턴에서 민간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었다. 지난해 세계 각국을 돌며 수십차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설명회를 가진 것처럼 동평구도 세계 순회공연에 돌입할 태세다.


동평구는 동북아 각국의 경제적 역동성과 상호 의존성이 심화되고 있음에도 안보·정치적 협력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역내 다자대화 틀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평화협력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동평구 역시 실체가 불분명하고 현실성이 없기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동평구는 원래 박근혜 정부의 고유모델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 시절 6자회담 결과물로 나온 개념 중 하나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2007년 2·13 합의를 통해 비핵화, 에너지·경제 지원, 관계 정상화, 동북아평화안보체제 등 4개 실무그룹을 만들었다. 이 4가지 요소들이 동시에 입체적으로 병행추진되지 않으면 동북아 평화 정착은 물론 한반도 비핵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6자회담의 결론이었다. 비핵화가 진전되려면 대북 경제지원이 동시에 논의되어야 하고, 이런 논의 구조가 지속되려면 남북관계 진전은 물론 북·미, 북·일 관계가 정상화 트랙에 올라서야 한다. 또 핵을 포기한 북한이 다시 핵무장의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면 북한의 안보 불안을 해소해줘야 하므로 항구적인 동북아 평화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양자간 동맹관계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현재의 동북아 안보 상황을 개편해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다자안보 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동평구는 이 4가지 실무그룹 중 동북아평화안보체제 개념만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이뤄지려면 앞서 설명한 한반도 비핵화, 대북 지원,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가 함께 굴러가야 한다. 동평구는 나머지 3개 요소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 기둥 4개 중 3개를 없애고 1개만 남긴 구조물이 제대로 지탱될 리 없다.

특히 남북관계 진전이 요원하고 한·일 관계가 단절된 현재의 상황은 동평구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동북아의 키 플레이어인 북한과 일본을 빼고 역내 평화협력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동평구는 미국의 ‘아시아 리밸런싱’ 전략과 상충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 미국의 지지를 받는 것도 쉽지 않다. 2009년 일본의 하토야마 정부가 추진했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구체성 결여와 미국의 지지 획득 실패로 허망하게 좌초한 전철을 동평구가 그대로 밟을 수 있다.

동평구의 구체화를 위해서는 6자회담 재개, 남북관계 진전, 한·일 관계 회복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동평구 세계 로드쇼’보다 이게 더 시급하다. 이행 방안이 없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고 미사여구로 가득찬 홍보에 열중하기 앞서 장기적 안목으로 난마처럼 얽힌 현재의 동북아 상황을 하나씩 타개해 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방에 대박을 터뜨리려는 허황된 마음을 버리고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가짐으로 겸허하고 신중하게 동북아 현안에 다가서기를 권한다.


유신모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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