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과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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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유태인과 한국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7. 30.

이민자들은, 특히 이민 1세대들은 자신이 떠나올 당시 고국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2010년 인구센서스에 잡힌 한국계 이민자 170여만명 중 85% 정도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1세대이거나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이주한 ‘1.5세대’들이다. 이들에게 많이 남아있는 고국의 이미지는, 이제 산업화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핍박받는 나라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들을 한국계라는 정체성으로 묶어주는 공통분모는 일본군 위안부와 동해 병기 등 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문제가 되곤 한다. 최근 몇년새 한국계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행동을 해서 주목받은 사례가 주로 일본군 위안부나 동해·일본해 병기 문제였던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 7주년이 되는 30일에 맞춰 미국 전역의 한국계 풀뿌리 활동가 150여명이 워싱턴 인근 한 호텔에 집결해 ‘한국계 미국인 풀뿌리 콘퍼런스’를 열었다. 이들은 이튿날 미 연방의회의 개별 의원실을 방문해 로비활동을 벌이기에 앞서 의회 로비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며 의지를 다졌다. 의원실 방문로비는 미국의 풀뿌리 환경단체, 시민단체들이 의회를 상대로 벌이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이민자들의 풀뿌리 운동이 출신 국가 또는 민족을 구심점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이민의 역사가 짧거나 이민 수용국에 동화가 덜된 이민자 집단의 경우 많이 나타난다. 보통은 세대가 내려가고 이민자들이 주류사회에 편입될수록 출신 국가의 정체성은 서서히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미국이란 국가가 만들어진 ‘멜팅폿’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민 수용국인 미국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렸지만 여전히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뭉친 예외적인 집단이 있으니 유태인들이다.

이날 풀뿌리 콘퍼런스 역시 유태인 로비조직 형태를 지향하며 기획됐다. 행사를 조직한 뉴욕시민참여센터의 김동석 상임이사는 29일 강연에서 유태계와 한국계 이민자들의 닮은 점을 거론하며 유태계 로비단체인 미·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AIPAC)와 같은 상설조직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한국계 미국인의 80%가 유권자로 등록하고 그중 80%가 투표장에 나오는 것이 유태계와 비슷한 지위를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유태계는 미국 인구의 2% 정도에 불과하지만 유권자 등록률은 92%로 최고라고 한다.

11년도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미·이스라엘공공문제위원회(AIPAC) 연례총회에 참석해 연설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_ AP연합

그런데 유태계 이민자들의 정치력이 미국 사회 나아가 국제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특히 최근 이스라엘군의 폭격에 가자지구 어린이, 민간인이 1000명 이상 죽어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두둔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그 정치력이 기여하고 있다면 말이다. AIPAC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안보를 동일시하며 미국 국토안보부 내에 미국·이스라엘의 안보협력을 전담하는 국(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AIPAC의 존재 이유는 미국이 중동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국익에 이롭다는 전제 위에 서있다고도 할 수 있다.

유태인과 한국인이 비슷하다고 할 때는 ‘시련을 겪은 민족’ 또는 ‘피해자’라는 집단기억이 있다. 유념할 것은 오랫동안 박해받은 유태인들에게 정착할 땅이 필요했다는 1940년대 중반의 선민의식과 피해자의식이 지금은 이웃의 억압받는 다른 민족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들 역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만남이 동북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하는데 기여할 것인지, 이스라엘과 미국의 만남처럼 역내 분쟁과 갈등의 씨앗을 키우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미국 내에서 풀뿌리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어깨에도 달렸다고 말하고 싶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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