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연사들의 수난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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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졸업식 연사들의 수난은 왜일까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5. 21.

일요일인 지난 18일 미국의 대학 캠퍼스 근처를 지날 때 검은색 또는 자주색 졸업 가운을 입은 앳된 얼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얼굴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살짝 비치긴 했지만 그날따라 눈부시게 좋은 날씨 때문인지 싱그러움과 패기가 더 느껴져 좋았다. 그런 점에서 5월을 졸업철로 잡은 것은 좋은 선택이다. 졸업식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커멘스먼트(commencement)라는 단어가 그래주에이션(graduation)만큼이나 많이 쓰인다.

올해 미국 대학 졸업식의 화두는 졸업축사 연사들의 수난이다. 지난 18일 열린 미국 대학의 졸업식에 연사로 초청받은 이들이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참석하지 못하고 급하게 섭외된 ‘대타’가 축사를 하는 일이 세 건 있었다.

시작은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지난 2월 일찌감치 럿거스대 졸업연사로 정해졌지만 학생, 교수들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이라크 침공에서 그의 역할을 이유로 반대 청원운동을 벌였고, 결국 자진 철회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여대인 스미스칼리지 졸업식 축사를 하려다 빈곤과 불평등 문제에 대한 IMF의 책임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에 부딪혀 자진 철회했다. 로버트 비르지누 UC버클리 전 학장은 헤이버포드칼리지 졸업식 축사를 자진 철회했다. 그가 2011년 높은 등록금 등에 반대하며 버클리 캠퍼스를 점거한 학생들을 진압하려고 경찰을 캠퍼스에 불러들여 폭력 진압을 초래한 것에 대해 헤이버포드 학생들이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세 연사는 모두 대학 이사회가 초청을 결정한 사람들이었고, 축사의 대가로 수만달러와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학생들의 반대운동은 주로 SNS를 통해 이뤄졌고, 일부는 연사 본인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했다. 연사들은 “졸업식은 축하 자리가 되어야 한다”며 점잖은 어투로 졸업식 참석을 자진 철회했다.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 (출처 :AP연합뉴스)


이례적으로 번져간 졸업연사들의 수난에 미국 기성세대도 놀란 듯하다. 마크 로젤 조지메이슨대 공공정책학장은 “미국의 졸업식 연사는 대개 기부를 촉진함으로써 대학 재정에 도움이 될 만한 유명인사가 선정된다”며 “이번에 반대에 부딪힌 연사들은 자금동원력보다는 나름대로 스토리가 있는 의미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매우 뜻밖”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등 주류매체들은 대개 학생들의 철없음을 탓하는 분위기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반대되는 의견을 아예 막은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에 비춰 옳지 않다는 논리다. SNS 행동에 나선 학생들을 ‘좌파(left)’라고 규정했다. SNS상에는 학생들의 반대 운동 역시 표현의 자유라는 글이 더 많이 보인다.

나는 세 건의 졸업식 해프닝들이 왜 지금 미국에서 벌어졌는지 아직 좋은 설명을 찾지 못했다. 다만 미국 젊은이들의 불만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무책임하게 벌인 전쟁, 탐욕적인 자본주의, 그리고 높은 등록금이 미국 젊은이들의 불만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예전에 국무부 행사에 갔을 때 조지워싱턴대를 갓 졸업한 인턴직원과 나눈 대화가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패기보다는 주눅 든 모습이 더 느껴지는 친구였다. “우리 세대는 정말 운이 없는 것 같다. 많은 빚을 내서 좋은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무보수 국무부 인턴 3개월은 분명 이력서에 쓸 좋은 경력이지만, 이 다음에는 또 어떤 경력을 더 쌓아야 할지 막막하다.” 미국의 실업률은 7.3%이다. 이 가운데 16~24세 청년 실업률은 15%에 이른다.

졸업(卒業)은 ‘일을 마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은 미국의 어른들이 많은 영역에서 아직 ‘졸’해야 할 ‘업’이 남았음을 보여준다. 어른들이 업을 졸하기를 기다리다 지친 미국 젊은이들은 이제 스스로 행동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둘러보니 그것이 미국만의 사정은 아닌 듯하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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