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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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6. 11.

최근 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 아카이브팀이 정리한 외교문서 중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1999년 5월 북한에 가서 말할 요점을 정리한 메모가 포함됐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국방장관으로 핵시설 정밀타격론자였던 페리는 대북정책조정관으로 ‘페리 프로세스’라는 미국의 새 대북정책 로드맵을 들고 북한에 가서 의사를 타진할 예정이었다. 이 메모에는 곳곳에 자필 수정이 가해져 있다. ‘Korea’를 두 줄 긋고 ‘조선’으로 고치고, ‘DPRK’를 ‘공화국’으로 수정한 것 등을 보면 어떻게 하면 청자의 마음을 얻어 일이 잘되게 해볼까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페리는 자신을 소개하며 수학자요, 기술자로서 냉전 때 펜타곤에서 무기개발 업무를 했지만, 1993년 국방장관이 되어선 자신이 개발했던 무기들의 목표물이었던 오랜 적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라는 새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등과 수시로 만나 지난 수십년간 미국의 대북정책의 모든 전제들을 재검토했고, 양당 지도부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도 긴밀히 협의했다고 했다.

뒤의 절반이 지워진 채 공개돼 아쉽지만, 공개된 부분만 보면 미국이 당시 얼마나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는지 알 수 있다. 페리가 밝히듯이 미국은 탈냉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재정립하며 전통적 적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교차승인을 받지 못한 북한은 미국의 큰 그림에서 돌출한 퍼즐 조각이었다.


페리는 북·미가 서로 다르지만 다름이 평화 공존을 가로막는 요인은 아니며, 한·미관계와 북·미관계가 제로섬게임도 아니라고 했다. 한반도 통일은 평화적이라는 전제하에 남북한이 방식을 결정할 일이고, 미국은 남북이 다가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을 하겠다고도 했다.

한 세기 훨씬 전 미국이 조선에 다가서며 그랬듯이 한반도는 지정학적 여건상 태평양 건너 먼 곳의 강대국과 관계를 맺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이롭다며 미군 주둔이 북한에도 해롭지 않다고 설득했다. 장황한 사설 뒤에 그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평화공존’과 ‘상호위협 감소’라는 목표가 핵무기와 양립할 수 없으니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가 열어놓은 북·미관계의 문을 함께 통과하자는 것이었다. 페리의 구상은 북한과의 협의를 거쳐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지에서 시작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끝나는 3단계 안으로 구체화됐다.

그 뒤 페리 프로세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최근 회고록 <어려운 선택들>에서 1999년 9월 북·미간 미사일 합의,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 등이 이어졌지만 북한과의 포괄적 합의가 구체화되기 전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해 ‘악의 축’ 발언을 하고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을 하면서 부시 행정부 말기에는 이미 북한이 핵무기를 여러 개 갖게 됐다고 했다.

페리가 대북 포용론을 얘기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북한이 핵실험을 세 번 하고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미국 내에는 북한과 일을 도모해 볼 정치적 동력이 거의 없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한반도 비핵화가 중요하고, 전쟁은 옵션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핵 문제의 당사자는 북·미이지만 한국은 미국을 통해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당 시 페리 프로세스에도 김대중 정부의 생각이 많이 포함됐다. 지금 한국의 비중은 그때보다 더 커졌다. 페리 메모의 앞 부분을 상기하고 싶다. “나는 양국 관계 현주소나 놓친 기회들을 논하러 온 게 아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도망칠 수 없고 역사가 우리에게 지운 책임을 회피해서도 안된다. 역사란 보이지 않고 통제불가능한 그 어떤 힘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이란 걸 경험으로 잘 안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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