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어벤져스’보다 리얼리티 없는 한국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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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어벤져스’보다 리얼리티 없는 한국 외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5. 14.

필자는 전쟁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들 역시 별로다. 상영시간 내내 닥치는 대로 부수며 가공할 만한 힘을 과시하는 사이 누더기처럼 변하는 도시와 추풍낙엽처럼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허구임을 알아도 불편하다. 할리우드 제작사들도 막가파식 부수기가 반복되면서 관객들이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을 감지한 것 같다. 촬영장소도 바꿔보고, 정체성 위기를 겪는 철학적 모습을 양념처럼 집어넣는다. 전형적인 선악의 경계를 허물어 약간의 리얼리티를 부여함으로써 과거 서부영화나 전쟁영화의 유치함을 극복하겠다는 의도인 것은 알겠지만, 하늘을 날아다니고, 고층건물을 한주먹에 파괴하는 비현실성의 난무 속에 주인공의 철학적 번민은 더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이보다 더 수준 낮은 리얼리티가 있다. 어벤져스의 어설픈 철학적 고민조차 없는, 가장 전형적인 선악의 이분법이 한국 외교를 지배하고 있다. 북한은 나쁜 나라, 일본도 나쁜 나라, 미국은 좋은 나라다. 나쁜 나라들이 착해지지 않는 한 외교는 없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반면 좋은 나라 미국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 우리 편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런 인식 속에 미국이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묻혀버렸다. 분단 이후에도 여러번 우리를 배신했던 미국이지만 이미 신화로 자리 잡아, 신화에 도전하는 사람들만 나쁜 사람, 나쁜 나라가 된다. 한·미관계는 어떤 외교적 가치보다 우선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외교수사에 의해 채색됐다.

우리가 보는 세계 역시 미국의 등에 업혀 바라보는 왜곡된 세계일 경우가 많았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재무장에 나선 일본은 비난하면서 이를 비호하는 미국은 비판하지 못한다. 현재 일본의 행보는 미국이 앞장서서 요청하는 구도인데도, 여전히 착한 미국이 일본의 나쁜 행동을 꾸중하고 막아줄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만 붙잡고 있다. 그러는 사이 주변국들은 한국의 취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중에서도 미국이 가장 잘 안다. 미국 자신은 이익을 챙길 때도 유독 한국에는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며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북한은 나쁜 나라니 접근하지 말라고 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이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을 보라고 역공을 펼친다. 우리의 선택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진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부터 스스로 만든 진정성의 프레임에 갇혀 고립을 자초해왔다. 외교적 주도권은 다 내다버려 손에 남은 것은 원칙과 몇 개의 아이디어, 그리고 대국민용 정치언술뿐이다. 그런데도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는 인식을 하고 있으니 진심이면 무능하고, 거짓이면 위험하다. 근본주의 외교는 불안을 먹고 자라고, 고립을 토해낸다. 해방 70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중견국가의 외형을 가지게 됐지만 여전히 외교적으로 너무도 빈곤하다.

4일 오후 박근혜대통령이 청외대 접견실에서 모게리니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를 접견에 앞서 기다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반도와 주변은 평화보다 진영대결, 협상외교보다 군비경쟁이 난무한다. 나쁜 나라 북한의 무기개발이 정부와 언론을 뒤덮고 있다. 잠수함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을 부각시키며 곧바로 대응하지 않으면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호들갑이다. 최고의 무기라고 수십조원을 들여서 개발하겠다던 킬 체인과 KAMD는 본격적인 개발도 하기 전에 이미 무능한 무기로 취급한다. 외교전략 부재의 빈 공간으로 북한의 무력시위가 최대 효과를 발휘하고, 애국을 가장한 군사근본주의가 맹목으로 몰아친다. 아무리 힘을 키워도 주변의 고래들과 무력으로는 경쟁할 수 없는데도 힘을 키우자는 선동만 한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에 대해서 비판의 날을 세울 때마다 정부 측 단골 반응은, 국내 정치와 달리 외교는 성과가 나타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교의 성공적 열매도 나중에 나타나지만, 실패에 대한 화도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왜 외면하는가? 게다가 선악의 이분법적 외교가 불안한 국민들에게 아주 잘 먹힌다는 것을 체득한 권력이 국가의 미래를 인질로 삼는 외교 현실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북한에 대해서 일본에 대해서 정부가 뭔가 일을 도모하기 시작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만큼은 전시용이거나 국내용이 아니기를 바란다. 원칙을 유연하게 만들고, 실용적 외교를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 필자도 이 정부가 참 나쁜 정부라는 생각에 유연함을 보탤 용의가 있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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