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아일랜드에서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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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아일랜드에서 쓰는 편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5. 31.

아일랜드로 가는 길에 제임스 조이스(J. Joyce)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뒤적인다. 아일랜드가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를 떠올리게 했다. 책꽂이를 풍경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도 한몫을 했다. 조이스란 우연한 선택은 읽기의 즐거움을 문학과 정치라는 논쟁적 주제로 변환하게끔 했다. 아일랜드섬과 한반도의 평화과정 비교라는 여행의 문제의식이 소설읽기의 매개였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조이스는 1904년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떠났다.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1914년 이 소설의 연재를 시작했다. 소설의 1장은 19세기 말 여섯 살의 조이스가 만났던 식민지 아일랜드의 정치와 종교다. 나의 맥락에서 1장이 울림 있게 읽혔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하기에 친영국적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남자 어른들과 아일랜드의 독립은 지지하지만 정치적으로 옳다 해서 종교적 다름이 용인될 수 없고, 그 어느 경우에도 종교가 정치에 우선해야 한다는 여자 어른의 말싸움으로 크리스마스 만찬을 마치는 장면을 보며 겁에 질린 어린 조이스는, “정치에는 두 편이 있었다”고 되뇐다.

그 정신적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즉 정치와 종교를 초월하는 자유로운 영혼인 예술가로 살아가고자 했던, 그래서 아일랜드를 탈출해야 했던, 조이스의 첫 번째 작품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그 비약은, 작가에게 현실의 정치적 갈등과 맞서지 않게 했다. ‘자기 유배’의 길을 간 조이스는 1912년 더블린 방문을 마지막으로 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초월했고 초월의 작품을 썼지만, 그 초월도 정치적 선택이었다.

조이스가 파리에서 다음 작품으로 <율리시즈>를 출간하던 해인 1922년 그의 조국 아일랜드는 식민지 상태에서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아일랜드자유국’의 탄생이었다. 일본의 식민학자 가운데 한명은 조선을 ‘일본의 아일랜드’로 부르며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아일랜드자유국의 설립을 계기로 아일랜드는 분단의 길을 가게 된다.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영국계 신교도 주민들이 자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아일랜드섬은 한반도처럼 전면전을 겪지는 않았지만, 무장갈등을 계속했다.

특히 북아일랜드에서는 친영국과의 통합을 지지하는 신교도 합병주의자와 충성파를 한 축으로, 아일랜드섬의 통일을 지향하는 친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 민족주의자와 공화주의자를 다른 축으로 하는 정치적 균열구조가 형성돼 있었고, 양 세력 모두 무장단체를 가지고 있었다.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에는 두 세력의 거주지역을 가르는 ‘장벽’이 있을 정도다. 다른 한편 남아일랜드인 아일랜드공화국은 헌법에서 북아일랜드가 자국의 영토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아일랜드공화국 헌법 2조에는 아일랜드공화국의 영토가 아일랜드섬과 부속도서, 영해로 규정돼 있었다.

1972년 북아일랜드의 데리에서 시위대에 대한 영국군의 무력진압으로 13명의 시민이 사망한 ‘피의 일요일’ 사건, 1981년 공화주의 민병대원들이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죽음을 맞이한 사건, 아일랜드섬의 평화를 위해 통일과 연합과 연방을 상상하는 작업 등은 아일랜드섬과 한반도의 유사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한반도와 달리, 아일랜드섬에서는 1970년대 서닝데일협정의 실패를 거쳐, 1985년 영국-아일랜드협정을 발판으로 1998년 ‘성금요일협정’이란 평화체제에 도달했다. 이 협정의 핵심은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통일아일랜드가 될 것인가는 북아일랜드 주민 다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미래의 기억’에 대한 합의였다.

영국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찰스 왕세자(왼쪽)가 19일 골웨이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게리 애덤스 신페인당 당수와 악수하고 있다. _ AP연합


성금요일협정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2조를 개정했다. 영토조항을 폐기하고 아일랜드섬에서 태어난 주민에게는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그 조항을 대체했다. 그리고 북아일랜드 내에서 경쟁하는 정치세력의 권력공유와 남북아일랜드의 협력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이 길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로, 갈등하는 당사자들의 상호인정 및 흡수와 배제의 배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에 대한 합의, 무장해제와 평화과정의 동시 진행, 미국과 유럽연합이라는 ‘양심적’ 중재자의 개입 등이 지적된다. 물론 성금요일협정이 순항하지는 않고 있다. 벨파스트의 장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갈등을 인지하면서도 예술가로서 갈등을 초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초월은 갈등의 재생산을 외면할 때, 가능한 내면의 선택이었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현실정치의 의제에서 실종된 상태다. 아일랜드섬의 평화체제가 수입가능한 재화일까, 아일랜드에서 쓰는 편지의 질문이다.


구갑우 | 북한대학원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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