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연 칼럼]종전선언, 미국이 조금만 양보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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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호연 칼럼]종전선언, 미국이 조금만 양보하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8. 22.

북·미 협상이 종전선언에 가로막혔다.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와 미국의 비핵화 요구가 팽팽하게 맞서 있다. 형식 논리상 북한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북·미 협상의 최종 목표는 비핵화와 체제보장이다. 그런데 체제보장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북·미 수교로 달성된다. 그 과정에서 종전선언은 체제보장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에 해당한다. 따라서 종전선언을 최종적 조치인 비핵화와 교환하자는 요구는 불공평하다. 1만원 걸 테니 10만원 걸라는 식 아닌가. 더구나 미국은 8개월 내 핵탄두의 60~70%를 없애야 종전선언에 응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이 “강도적 요구”라고 발끈할 만하다.

 

미국은 종전선언의 개념과 방향에 대한 의견을 밝힌 적이 없다. 하지만 고위 인사들의 발언을 통해 드러난 인식을 보면 매우 완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종전선언을 하면 후퇴할 수 없다”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종전선언을 대단히 무겁게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먼저 종전선언은 후퇴할 수 없는 조치가 아니다. 통상적인 의미의 종전선언은 한반도 전쟁을 종료하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로, 법적 구속력이 없다. 종전선언 후 북한이 상응하는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는다?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편익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하겠는가.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비핵화 협상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미국은 북한이 종전선언 후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동맹 역할 변화 등의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우려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나 다룰 사안이지, 그전 단계인 종전선언 과정에서 거론할 이유가 없다. 특히 주한미군의 경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국 주둔을 용인하는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미국이 불안하다면 종전선언에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일정표를 담는 것이다. 아예 종전선언 명칭에 ‘한반도 비핵화’를 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예컨대 ‘한반도 전쟁종식과 비핵화를 위한 선언’은 어떤가. 북한과 미국의 요구가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종전선언을 “한갓 정치적 선언”이라며 의미를 낮춘 바 있으니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종전선언은 ‘한갓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지구상 최후의 냉전 지역인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종료시킬 이 선언은 정치·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전쟁 종결을 선언함과 동시에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효과도 각별하다. 먼저 미국이 북한을 외교관계를 맺고 경제협력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인정하는 수단이 된다. 북한 체제보장의 증표가 될 수 있다. ‘비핵화-체제보장 프로세스’ 도중 안보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종전선언이 그 과도기의 안전을 보장하는 담보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은 북한에 비핵화의 명분도 제공해줄 것이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9·9절을 맞아 김정은 위원장의 성과로 삼을 작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9·9절 방북을 검토 중이라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행보가 주목된다. 시 주석 스스로 선물이 된다면 김 위원장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 미국에도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사실 종전선언의 ‘저작권’은 미국에 있다. 2006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 덕에 노무현·김정일의 ‘10·4 남북공동선언’에도 담을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사실상 종전선언에 합의했다. 앞서 미국은 ‘연내 종전선언’을 담은 4·27 판문점선언을 지지했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수락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미국이 멈칫거리는 것은 주류 정치인 등이 진을 친 반트럼프, 반북 세력의 반발과 공세 탓이 크다. 여야, 진보·보수를 넘어서는 이들은 북한과의 협상이 아니라 완전항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북·미 간의 불신 때문이다. 상대가 더 큰 이익을 보게 될 것이란 생각, 상대가 속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국가 간 협력을 어렵게 만든다는 미어샤이머의 법칙이 북·미 간에도 작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식 또는 비공식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북·미는 핵실험장 폐기와 군사훈련 중단 등 신뢰조치들을 교환해왔다. 앞으로도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조치들을 지속적으로 주고받는 수밖에 없다. 종전선언도 그중 하나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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