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민의 아침을 열며]재기 꿈꾸는 일본 기업들의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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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조홍민의 아침을 열며]재기 꿈꾸는 일본 기업들의 ‘귀국’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2. 8.

“40도에 육박하는 땡볕 속에서 500㎞ 이상을 달렸는데 차량 온도게이지가 올라가지를 않더라고. 처음엔 차가 고장난 줄 알았지.”

1990년대 후반 미국 연수 시절 현지에서 일제 자동차를 몰아봤다는 한 선배가 며칠 전 털어놓은 경험담이다. 선배의 차는 일본 닛산자동차의 중고 맥시마였는데 연수 기간 1년 동안 단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자동차 기업들 망하려고 작정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너무 잘 만들면 소비자들이 한번 산 차를 바꾸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그러면 신차 매출이 늘어나겠느냐는 얘기였다. 사실 일본 자동차는 선배의 말처럼 탄탄한 기술력으로 지난 수십년간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다. 잔고장 없는 내구성과 우수한 연비, 매끈한 디자인은 세계 1위의 자동차 메이커 도요타를 탄생시켰고 ‘기술의 혼다’ ‘디자인의 닛산’과 같은 찬사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차의 신화’는 2009년 도요타자동차의 대량 리콜 사태를 계기로 주춤하기 시작했다.

“북미, 유럽, 일본에서 판매 대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장 상황이 대단히 어렵고….”

2009년 2월 도요타의 기노시타 미쓰오(木下光男) 부사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2008년 4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결과는 무려 1647억엔의 적자였다. 그해 적자 예상치만 4500억엔에 달했다. 한 해 전 발표한 2007년 결산에서 매출 19조7221억엔, 순이익 1조4010억엔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힌 지 1년 만의 급전직하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도요타의 굴욕’이라고 표현했다. ‘세계 1위’에 집착한 나머지 성장과 팽창을 우선함으로써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탓이었다. 원가 절감을 위해 해외생산을 늘리고 부품을 외국 하청업체에 맡기면서 품질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도요타의 자랑인 ‘현장 중시’와 ‘모노즈쿠리 정신(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실종된 것이다. 전 뉴욕타임스 기자인 데이비드 할버스탬은 저서 <패자(覇者)의 교만>에서 “도요타는 싸고 좋은 품질의 대중차를 착실히 노력해 만드는 것이 장점인데 언젠가부터 이익 우선주의에 빠졌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사례는 비단 자동차 업체만의 얘기가 아니다. 그동안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일본의 전자, 전기, 정밀기계 분야도 최근 몇 년간 부진을 거듭해왔다. 구조조정을 통한 인원 감축, 일부 사업의 해외 매각, 관련 업종 간 합종연횡 등 침체를 탈피하기 위한 제조업체들의 몸부림이 계속됐다.

도요타가 자동차 리콜 조치 후 미국 대형 일간지에 게재한 신문광고 (출처 : 경향DB)


그러던 일본의 제조업이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중국 등 해외로 이전했던 생산기지를 국내로 ‘유턴’시키려는 움직임이 최근 가속화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계기로 국제 외환시장에서 엔저 기류가 정착되면서다. 일본 국내에서 만드는 편이 비용절감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공장들의 회귀가 속속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닛산자동차는 올 들어 국내 생산 대수를 10만대 늘리기로 하고 북미 수출용 차량 생산을 규슈 공장에서 재개하기로 했다. 전자업체 파나소닉도 지난달 해외에서 생산하고 있는 전자레인지 등 백색가전의 일부 제품을 국내 생산으로 돌리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카메라 업체인 캐논의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富士夫) 회장은 지난달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약 40%에 머물고 있는 제품의 국내 생산 비율을 2~3년 후에는 6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캐논은 2008년 리먼 쇼크 전까지 국내 생산 비율이 60%에 달했지만 엔고의 직격탄을 맞아 해외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비율을 높여왔다. 미타라이 회장은 인터뷰에서 “(해외이전은) 긴급 피난이었다. 그동안 쭉 일본으로 회귀할 타이밍을 지켜봐왔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말했다.

기업들의 실적도 회복되고 있다. 도요타는 오는 3월 결산에서 3조엔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했다. 금방 무너질 것 같았던 소니도 지난해 3분기까지 1626억엔의 영업흑자를 달성하면서 부활을 예고했다. 이 같은 성과는 엔저의 효과도 크지만 기업 스스로의 체질 개선과 자구노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1968년 국내총생산(GDP)에서 서독을 제치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에 올라섰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저성장과 부동산 거품 붕괴를 거치면서 장기 불황에 빠졌다. 2010년에는 중국에 밀려 2위 자리까지 내줬다. 하지만 요즘 일본 제조업체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1960~1970년대 제조업과 수출을 밑거름으로 고속 성장을 이뤄낼 당시를 연상시킬 정도다. 우리가 잔뜩 긴장해야 할 때다.


조홍민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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