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범죄 친화적 현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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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탈세·범죄 친화적 현금제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2. 28.

나라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생각과 관계는 다르며, 화폐를 발행·관리·통제하는 방식 또한 각각이다. 최근 독일에서는 현금거래를 통제하려는 정부의 계획이 논란을 빚고 있다. 독일 재무부가 범죄 집단의 자금 세탁과 테러 방지를 위해 5000유로 이상의 현금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시하자 녹색당, 자민당, ‘독일을 위한 대안’ 등 모든 야당이 반대하고 나섰다. 독일은 전체 거래에서 현금이 79%의 비중을 차지하는 유럽에서 매우 독특한 나라다. 빚을 죄악으로 여기는 문화 때문에 신용카드나 수표 등의 사용이 현저하게 낮다. 하지만 유럽이 유로라는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면서 현금문화의 독일은 각종 탈세와 자금세탁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다른 나라에서 불법적으로 획득한 유로를 독일에서는 쉽게 풀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달리 라틴계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현금거래를 제한해 왔다. 워낙 탈세와 암시장이 기승을 부리는 문화 때문에 국가가 경제를 강력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프랑스는 지난해 9월 현금거래 금지한도를 3000유로에서 1000유로로 강화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2011년 한도를 1000유로 수준으로 강화했다가 마테오 렌치 좌파 정부가 2016년부터 3000유로로 다시 완화했다. 렌치의 선택이 탈세 확산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악화를 감수하면서 상인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이라 비난받는 이유다. 물론 법을 어기고 현금으로 거래를 하다 발각되면 40%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또한 모든 부동산 관련 거래는 현찰로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리 많은 현금을 쌓아 놓고 있더라도 돈을 쓰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유럽에서 국민의 준법정신이 투철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현금거래 제한이 없다. 또 비즈니스 친화적인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현금거래를 제한하지 않는다. 정부의 개입을 싫어하는 반국가적 정서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의 경우 1만달러 이상의 거래는 정부에 보고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고액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미국의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100달러 지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유럽중앙은행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 역시 500유로 지폐 발행을 재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둘 다 고액권이 범죄 집단에 의해 악용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일각에서는 마이너스 금리정책에 방해물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외국의 사례에 비추어 한국을 보면 어떤가. 폭증하는 민간부채가 보여주듯 한국은 독일처럼 빚을 죄악시하는 나라는 아니다. 그렇다고 스칸디나비아처럼 준법정신이 투철해 세금이 수월하게 걷히는 나라도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탈세에 대해 별 죄의식이 없는 경우에 가깝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현금거래에 대한 법적 제약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5만원 고액권까지 새로 도입해 국가가 불법과 탈세를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한국도 근래에 금융기관의 현금 고액거래 보고를 5000만원에서 2000만원 이상으로 강화한 바 있다. 이 한도는 가장 비즈니스 친화적이라는 미국(1만달러)보다 높은 수준이며, 그것도 금융기관을 통한 거래만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다. 미국은 1만달러 이상의 모든 현금 상거래를 15일 안에 당국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한국이 ‘차떼기’의 나라가 될 수 있고 음료수 박스에 현찰을 받은 혐의로 총리가 사임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한 뿌리에는 이런 제도적 블랙홀이 존재한다. 현재 현금에 관한 한국의 제도는 비즈니스 친화적인 수준을 넘어 부패·탈세·범죄 친화적이다. 경제 거래에 대한 정부 감시의 강화가 부패 척결의 전부는 아니지만 ‘검은돈’을 거래하거나 사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제도 도입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조홍식 |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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