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가스관 사업, 러시아의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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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특파원 칼럼]가스관 사업, 러시아의 계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9. 14.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에 지명된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조정관은 지난 7일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에 대해 ‘대화와 제재’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접근법은 예나 지금이나 미 행정부가 유지하고 있는 정책임을 강조했다.

웬디 셔먼

셔먼의 발언은 자신을 대북 유화파로 인식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대북정책 속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대화와 제재, 투트랙 접근, 당근과 채찍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긴 했지만 미국의 대북정책은 결국 북한의 행동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팃 포 탯(Tit for Tat·맞받아치기)’으로 요약된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제네바 합의와 페리 프로세스가 그랬고, 조지 W 부시 행정부 초기 ‘대담한 접근’이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과 보폭을 맞춰온 한국의 대북정책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비핵개방 3000’과 ‘그랜드 바겐’을 주장한 이명박 정부 역시 ‘조금 더 큰 채찍과 조금 더 큰 당근’을 사용했을 뿐 다를 것이 없다.
차기 대권주자라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제시한 ‘얼라인먼트 폴리시’도 ‘균형외교’라는 엉뚱한 번역까지 동원해 신선한 것인 양 치장하긴 했지만, 내용은 북한의 행동에 따라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하는 전형적인 ‘팃 포 탯’이다. 이 접근법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켜 왔다.
그런데 미국이 북한을 포기하다시피한 지금, 한동안 한반도 체스판에서 멀어졌던 러시아가 다시 게임을 시작하고 있다.

러시아의 접근법은 북한을 안보·경제적으로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스스로 핵을 포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동북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안보적으로 동등한 지분을 갖는 다자안보체제를 구축해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경제적으로는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을 건설해 북한을 국제 비즈니스 세계로 끌어들이려 한다. 북한이 주변국과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게 만들어 긴장을 없애려는 의도다.
러시아의 접근법은 북한의 안보·경제 상황은 그대로 두고 핵무기만을 외과수술하듯 도려내려는 미국의 접근법과 다르다. 물론 전략적 계산이 숨어 있다. 중국·미국에 비해 동북아 각국과의 양자적 관계가 미약한 러시아로서는 이 지역에 다자안보체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또 가스관을 통해 동북아 각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짙다.

이명박 대통령은 가스관 사업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전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러시아 가스관을 덥석 움켜쥐기 전에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다. 한·러 관계가 상호의존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에 에너지 안보를 위탁하는 것이 안전한지,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을 크게 키우는 것이 정부의 대외정책 방향과 부합하는지, 복잡해지는 북핵 해결 방정식이 한·미 관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

러시아의 가스관 사업은 이란의 가스관 구상과 유사하다. 이란은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까지 이어지는 가스관을 건설하려 한다.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미국은 동맹국인 인도에 이 사업을 중단하라고 요구 중이다. 미국이 지금은 가타부타 말이 없지만,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에 주도권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깔아놓은 판에 뛰어들기 전에 정부가 이 같은 전략적 검토를 충분히 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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