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현상’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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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트럼프현상’의 이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9. 22.


요즘 워싱턴 정가의 관심사 중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의 높은 지지율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이다. 6월16일 멕시코 이민자들을 “강간범”이라고 부르며 대선 출마 선언을 할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성마른 이 부동산 갑부가 오래 못 갈 줄 알았다. 하지만 트럼프는 공화당의 초반 경선 판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대중유세와 TV토론을 거치며 그의 언행은 계속 논란이 됐다. 이민자들을 범죄시한 데 이어 베트남전 포로 출신인 존 매케인을 영웅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여성앵커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발언도 했다. 한국이 잘살면서 왜 계속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느냐며 미국인들 세금을 다른 나라 지켜주는 데 쓰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도 했다. 논란이 일수록 그의 인기는 치솟았고 두 달 이상 공화당 후보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다.

외신기자이기 전에 미국에 사는 외국인인 내 입장에서 ‘트럼프현상’은 보수적인 미국 백인들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정치적 올바름’에 신경쓰지 않는 트럼프의 언행을 보면서 매너 좋고 점잖게(비비 꼬아서) 말하는 이웃집 백인들을 접하며 뭔가 개운치 않았던 뒷맛들이 비로소 풀리는 느낌이랄까. 가령 이들에게는 ‘가뜩이나 어려운데 이방인들이 자꾸 몰려와 내 몫이 줄어들어 싫다’든가, ‘나랑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속내가 있지만 자신의 격이 떨어질까봐 차마 대놓고 말을 못할 뿐이다.

워싱턴의 이른바 ‘교양 있는’ 사람들은 트럼프에 대해 ‘미친 사람 얘기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트럼프 돌풍이 불기 시작할 무렵인 7월 하순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자는 사석에서 “트럼프는 절대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없고, 설사 후보가 된다 하더라도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침표”라고 말했다. 트럼프현상은 신기루 같은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성정치권 외에 대안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제 그렇게 단언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트럼프를 무시하던 공화당 주자들은 TV토론의 구석자리나 마이너리그로 밀려나는가 하면, 급기야 릭 페리, 스콧 워커가 경선을 포기했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의 응답자 추적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부동층보다는 젭 부시, 랜드 폴, 스콧 워커, 마르코 루비오, 테드 크루즈 등 유력주자들의 표를 많이 가져갔다. 부시 지지자의 11%, 워커 지지자의 17%, 폴 지지자의 18%, 루비오 지지자의 21%, 크루즈 지지자의 47%가 트럼프에게 갔다.

트럼프현상은 기성정치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됐다. 그런 점에서 2012년 한국의 ‘안철수현상’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은 부동층이 아니라 대부분 공화당 기득권층에 적극적으로 투표해온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안철수현상과 구별된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 노선을 거슬러 부자증세를 내세운 것이 한 요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헤지펀드 등 투기자본의 성공보수에 일반 소득보다 낮은 세율을 매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해 벤 카슨 등 경쟁 후보들에게서 ‘사회주의 냄새가 난다’는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공화당의 원래 유력주자인 부시는 최근 기민하게 트럼프 주장을 반영한 세금 공약을 내놨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 통계를 다시 인용하자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절반 이상이 고졸 이하 학력이고, 3분의 1 이상이 연소득 5만달러 미만이다. 공화당 지지층의 평범한 얼굴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소득도 별로 높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트럼프현상은 소수 부자들의 이익이 마치 대다수 서민의 이익인 것처럼 대변되어온 미국 정치의 왜곡을 드러낸 측면도 있는 셈이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가 출마 선언 때 말했듯 거액기부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스스로가 아주 부자라는 점이다.


워싱턴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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