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덥히는 한 끼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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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가슴을 덥히는 한 끼의 식사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12. 9.

목수정 | 작가·프랑스 거주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친구와 함께 식사를 했다. 족히 3개월 전부터 여기에 꼭 가봐야 한다고, 열 번쯤 말하던 친구를 따라 드디어 입성한 그곳. 두 개의 창문은 붉은 벨벳으로 반쯤 닫혀 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역시, 문 높이의 붉은 벨벳 커튼을 밀고 들어서야 홀이 드러난다. 마치 기웃거리는 뜨내기 손님은 사양한다는 듯, 꽁꽁 숨어있는 식당을 들어서면, 15평 남짓한 작은 내부에 식탁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직접 반죽해서 구운 따뜻한 빵. 재료를 짐작하기 힘든, 마술 같은 소스 밑에 바싹 구워진 생선요리. 노르망디에서 공수해 온 짭짤한 수제 버터. 식당의 소믈리에가 골라놓은 묵직한 2001년산 적포도주. 마지막, 커피 잔에 나란히 곁들여 나오는, 주방장이 만든 콩알만한 초콜릿까지. 과연 소박하면서도, 모든 식사 단계에서 1㎝만큼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이 깐깐한 식당의 구석구석에선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 식당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음식을 먹는 손님들이었다. 조용 조용 함께 온 사람들과 대화를 즐기면서도, 그들은 모두 엇비슷한 집중력으로 그들의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음미하고, 평가하며, 소위 미식가들만이 갖는 진지함으로 음식과의 소중한 만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옆에 앉은 공모자들과 동조의 눈빛, 혹은 가벼운 농담들을 슬쩍 주고받으며.

이 날, 모든 손님들의 식탁에는 보르도산 포도주 한 잔이 놓여있었다. 즐거운 식사의 완성을 위해 한 잔의 포도주를 곁들이는 일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알맞게 농익은 기막힌 맛의 포도주가 발휘하는 마술이 식당의 모든 사람들을 온화하고 가볍게 상기된 분위기로 휘감고 있었다.

프랑스인 열 명 중 아홉 명은 식사를 소중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응답자의 90%는 식사를 하는 것이 소중한 기쁨이라고 답했고, 한끼 식사에 걸리는 평균시간은 1시간30분이 살짝 넘어선다.

이 유난스러운 미식가적 습관은 지난 11월 케냐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요리와 테이블 세팅, 식사 매너 등이 총망라된 ‘프랑스식 식사’가 세계 무형문화 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유네스코는 “프랑스 요리법과 식사법은 개인과 집단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나누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사회적 관습”이라고 평가했다. 점심 한끼를 위해 무려 1시간30분을 친구·동료와 마주앉아 느긋하게 맛과 삶의 여유를 즐기는 이 나라 사람들의 식사 관습에는 성공하고 앞서가야 하는, 쫓기는 현대적 삶이 침범할 수 없는 묵직한 의미가 담겨있다.

최근 프랑스의 한 포도주 회사가 ‘남대문(Grande Porte Sud)’이라는 포도주를 내놔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이 포도주가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이다. 대부분의 포도주는 생산지와, 그것이 만들어진 샤토(성:城)의 이름을 라벨로 한다. 산지는 보르도지만, 남대문이라는, 서울에 있는 문화유적을 포도주 이름으로 정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례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남대문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한데 이어, 그것이 화재로 전소되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한 이 포도주 회사의 사장이 남대문의 부활을 기원하는 애틋한 마음을 품으면서 남대문 와인은 탄생했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 훈훈한 마음이, 배를 채우기보다, 가슴을 훈훈하게 덥히는 식사를, 그래서 휩쓸려가는 삶의 리듬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놓는다면, 그렇게 한번쯤 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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