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철도를 따라가는 삶과 죽음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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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도시철도를 따라가는 삶과 죽음의 지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2. 28.
15분이 평균 수명 2배를 좌우한다? 파리 면적은 서울의 4분의 1, 인구도 딱 그만한 수준인 250만명 규모다. 여기를 지하철 노선 14개, 파리를 관통하며 파리 외곽으로 길게 연결하는 장거리 도시철도 RER노선 5개, 도합 19개의 도시철도 노선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거리를 지나고 있다. 파리시 어디를 가나, 마을버스라는 2차 수단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지하철로만 이동할 수 있다.
40여 개에 불과한 버스는 깍두기, 혹은 덤의 역할이다. 급하지 않을 때 천천히 굴러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산책하듯 파리 시내를 이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파리는 대중교통 면에서만큼은 나무랄 데 없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설계된 듯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 나무랄 데 없는 듯한 교통현실의 이면에는 불평등과 부조리가 거미줄처럼 또 다시 얽혀있다.

파리 지역의 대중일간지, 르 파리지앵지는 6개월이 멀다 하고 비슷한 기사를 1면에 싣는다. ‘RER, 대체 언제까지 !!!’ 이런 표제 아래에는 불만이 가득한 시민들이 RER의 기다란 전동열차에서 밀려나오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다. 우리에게 지하철 1호선이 지옥철의 악명으로 불리고 있듯이, 파리의 장거리 도시철도 RER는 파리 외곽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골칫덩어리다. (물론 진정한 골칫덩어리의 주인공은 외곽 주민들의 쾌적한 삶 따위는 안중에 없는 위정자들일 터) 거의 고장이라곤 없고 2분에 한 대씩 오는 지하철에 비해, RER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고장이 발생한다.

경향신문DB

 

그러다 보니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약속된 시간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낙후한 설비에 대한 투자, 인력 투자를 게을리하다 보니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은 가중될 수밖에 없고, 더불어 파업도 증가할 수밖에 없다.

파리 외곽으로 파리의 범위를 넓히면 비로소 서울인구에 육박하는 1000만 거대도시가 된다. 250만의 진골(?) 파리시민들은 그럭저럭 쓸 만한 대중교통시설에, 도시 곳곳에 널린 공공자전거 서비스까지 받으며 쾌적하게 이동의 권리를 누릴 수 있지만, 파리 외곽에서 살며, 파리 시내로 출퇴근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 폭발 직전의 교통서비스를 참고 산 지 오래다.

시민건강과 도시개발의 관계를 연구하는 에마뉘엘 비느롱 교수는 ‘도시철도를 따라가며 살펴보는 파리와 방리유(파리외곽)에서의 도시, 삶, 죽음’이란 제목의 지도를 제작해 철도 노선이 관통하는 동네에 따라 어떻게 이들의 삶의 조건이 달라지는지를 계량적으로 보여준다. 이 지도는 북쪽의 드골 공항과 남쪽의 오를리 공항 사이를 관통하는 RER B선을 따라가며, 파리 외곽과 도심의 철도역 주변의 서로 다른 삶과 죽음의 조건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정차 역에 따라 평균 수명이 2배까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시간으로는 불과 15분 정도 전철을 타고 이동하면 오래 사는 동네에서 단명하는 동네로 이동하는 것이다. 여기에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들은 스트레스, 환경오염, 주거 조건 등 수백가지. 

비느롱 교수는 이 가운데에서도 각 동네에 있는 의사의 숫자를 또 하나의 핵심 요인으로 지적한다. 파리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는 인구 1만명당 20.3명의 일반의가 있는데 반해, 오베르빌리에 지역에는 1만명당 5.9명의 일반의가 있다. 전문의의 경우, 이 차이는 68.5 대 1.6으로 더욱 크게 나타난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삶의 틀거리 속엔 필연코 불평등이 존재하게 마련일까. 끊임없이 공정하게 부를 배분하는 힘을 구축하지 못하고, 아래로부터 평등과 자유를 줄기차게 요구하지 않는 한, 저절로 평등이 우리 속에 숨쉬는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 듯. 

무상의료, 무상교육, 그리고 19개에 걸친 이 막강한 기간시설만으론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섬세한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평등을 조율하는 강력한 힘이 모든 정책에 깃들여야 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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