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 10주기 맞는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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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부르디외 10주기 맞는 프랑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1. 31.
 목수정 | 작가·파리 거주 

사회학자라고만 부르기에 너무 뜨거운 이름, 피에르 부르디외가 그 꺼지지 않은 불씨를 프랑스 사회에 다시 뿌리고 있다. 폐암으로 사망한 지 10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아찔한 내리막길 앞에 희망도 없이 머뭇거리는 프랑스에 ‘세계의 비참’을 말하고, 신자유주의에 격렬히 저항했던 부르디외가 다시 초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부르디외 특집을 다루고 문화센터에서는 부르디외를 다룬 영화가 상영되며 곳곳에서 토론회가 열린다. 생존 당시부터 부르디외를 언급하지 않고 사회과학 분야의 논문을 쓰는 것이 불가능했을 만큼 그가 실증해온 방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한국에서조차 확고한 현대사회 분석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10년 전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이곳 언론이 부르디외를 대하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역력하다.

좌우를 막론하고 촘촘히 얽혀 있는 지배계급의 세습과 권력의 재생산 구조, 거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해온 학교와 매스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그의 폭로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특히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들락거리며 준연예인 행세를 해온 사교계 지식인들과 그들을 동업자 삼아 지배권력을 유지시키는 ‘집 지키는 개’ 노릇을 해온 매스미디어에 그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리베라시옹은 여전히 부르디외의 미디어에 대한 분석을 ‘빅 브러더식 에스프리의 통제에 대한 환상적인 비전’이라고 비꼬고 있다. 프랑스 언론이 그에게 박아놓은 미운털은 여전하지만 부르디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학술논문에 푸코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다. 

MBC 기자들이 보도국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l 출처 : 경향DB



그의 영향력은 사회학뿐 아니라 역사·문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며 부르디외주의자 그룹을 형성 중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세계적인 지식인 연대를 갈망했던 그의 소원은 이렇게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또한 그가 구별짓기, 재생산, 아비투스(habitus) 개념 등을 통해 보여준 각 사회적 계층이 재생산을 해내고, 계승해 가는 세계의 비참이 범지구적 현상임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르디외는 레비 스트로스나 사르트르 같은 고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으나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기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행동에 나서고자 하는 더운 피를 가진 청년이었다.

부르디외의 미디어에 대한 신랄한 비판 이후 PLPL, PLAN B 같은 비판적 독립 언론이 생겨났고 언론감시 시민단체인 ‘아크리메드’ 같은 협회가 조직됐으며, 언론과 재벌, 권력 간의 유착을 폭로하는 영화들, 특히 피에르 카를의 영화들이 부르디외의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시각들을 확산시켰다.

최근 개봉된 영화 <새로운 집 지키는 개들>. 이 작품은 권력과 재벌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언론인들의 타락한 모습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다큐로 부르디외 사상이 영화로 계승된 사례다. 5년 전 사르코지 대통령을 당선시킨 1등 공신 역시 그를 위해 충실하게 짖어준 언론이다. 여전히 자본과 권력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타락한 미디어를 구해낼 방안은커녕 그 필요성조차 역설하지 못하고 있는 맥빠진 대선전을 앞두고 프랑스인들은 새삼 부르디외의 책장을 바쁘게 넘기고 있다.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것을 이 사회는 다시 해체해낼 수도 있다고 부르디외는 말했다. 

차마 그들에게 맡겨진 권력의 시녀 노릇을 더는 할 수 없다고 내던지고 나선 MBC의 방송인들처럼. 역겨움이 목까지 차오르면 다 내던지고 정면으로 맞붙어야 한다. 연구실을 박차고 언제든지 파업현장에 달려가 새로운 역사의 현장에 자신의 힘을 실었던 부르디외는 이미 보여주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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