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을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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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빛과 어둠을 다루는 방식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2. 15.
얼마 전 한국에서 오신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파리15구는 흑인들이 없어서 밤에 혼자 다녀도 안 무섭다던대요.” 순간 절벽 아래로 쿵 떨어진 느낌. 아, 이토록 순진하고 솔직한 인종차별적 발언, 얼마 만에 들어보나! 

“프랑스, 인종차별 해요?” 종종 듣는 질문이다. 처음 이곳에 오기 전, 나 역시 가장 궁금해하던 점이다. 만약 한국 사람들이 동남아 이주노동자들 취급하듯이 프랑스 사람들이 날 취급한다면, 과연 그 차별을 견딜 수 있을까. 
 

프랑스의 새 이민 법안에 대해 반인종차별단체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l 출처 :경향DB


 
가슴 졸이며 이 나라에 도착해 1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인종차별이다 싶은 경험을 한 건, 두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피부로 느꼈던 것보다 종종 설문조사에서 드러나는 이곳 사람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의식이 놀라웠을 정도.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인종차별을 하는 것은 부끄럽고 상식에 어긋나는 일로 간주되며 심지어 법에 저촉되는 일이므로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종차별적 발언을 사석에서 내뱉는 것만으로도 사법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사의 수석 디자이너 갈리아노는 한 카페에서 옆사람과 언쟁을 벌이다, 유태인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향수회사 겔랑의 후계자 장 폴 겔랑도 “네그르(흑인들에 대한 경멸적 호칭)들이 이렇게 일을 잘하는 줄 몰랐다”는 발언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며, 시민단체들은 겔랑 향수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 이후, 서구가 스스로의 문명에 대해 가졌던 확고한 나르시시즘은 균열을 맞이하고, 다른 문명에 대해 우월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야만이라는 사고가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전쟁과 나치즘의 광기, 파시즘의 야만이 서로를 할퀴고 난 뒤에 유럽 사람들이 얻은 고귀한 정신의 유산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스 내무부 장관 게앙이 열흘 전에 한 “세상의 모든 문명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라는 발언은 폭탄 그 자체였다. 그는 “세상의 어떤 문명은 분명 하등하고, 그러니 차별받는 게 당연하다”는 말을 이슬람 문화와 아랍인들을 겨냥해 던졌다. 반이민자정책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극우정당의 르펜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 원색적인 발언은 어떻게 튀어나온 걸까.

대선을 겨냥한 계산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금융자본주의가 망쳐놓은 폐해가 상위 1%가 아닌 모두에게 엄습하는 지금 “이게 모두 이민자들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극우정당의 속삭임은 가난하고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침투했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지지율은 사르코지를 바짝 추격하고 사르코지는 사회당 대선주자에게 한참 뒤처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극우정당보다 한 술 더 떠요. 우리한테 표를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게앙의 입을 빌려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극우파의 표는 요지부동이고 사르코지는 소득 없이 인류가 힘겹게 지켜온 가치들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중이다.

프랑스의 해외령 마르티니의 국회의원 세르쥬 레치미는 게앙의 폭탄 발언을 향해 국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당신의 발언은 인류의 모험이 가져온 풍요에 대한 거부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문화와 문명들이 나누는 향연에 대한 테러다. 세상의 모든 문명은 빛과 어둠을 다루는 각자의 방식을 갖고 있으며, 그 어떤 민족도 아름다움과 과학과 진보와 지성을 독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환기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정신의 유산일지라도 저절로 지켜지는 것은 없다. 생각없는 악동의 발길질에 허무하게 굴러떨어져 내리는 인류의 소중한 가치를 모두 함께 다시 끌어 올려놓는 수밖에. 들판의 시시포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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