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정의 파리통신]프랑스서 재현되는 구소련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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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의 파리통신]프랑스서 재현되는 구소련의 풍경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8. 21.

목수정 | 작가·파리 거주


소련이 붕괴되기 전, 서유럽인들은 종종 소련의 느린 속도를 비웃는 농담들을 하곤 했다. 이를테면, 어느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한 한 노동자가 영웅 칭호와 함께 선물로 자동차 한 대를 당으로부터 받게 됐다. 그는 선물증서를 들고 자동차 매장을 찾았다. 


“동지, 축하합니다. 그런데 차는 11년 뒤에 배달됩니다.” 영웅이 된 노동자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전인가요, 오후인가요?” “오전입니다”. 노동자는 정색을 하며, “아 그건 좀 곤란합니다. 그날 오전에 벌써 배관공과의 약속이 잡혀 있거든요”. 과장된 농담이지만,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길게 줄 선 소련 사람들의 모습은 그 시절, 고장난 시스템 속에 방치된 소련인들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에서도 무엇 하나 사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30년 전, 그들이 비웃던 그 생활이 이곳에서 재연되는 것이다.


새집으로 이사를 한 후, 살림 몇 가지를 마련하러 다니던 중, 마음에 드는 소파가 있길래, 사기로 하고 언제 배달되는지 물었다. 7주 뒤. 뒤로 넘어갈 뻔했다. 7주! 사실은 5주 정도인데, 8월엔 노동자들이 휴가를 가서 넉넉잡아 그렇단다. 욕실 공사에 필요한 타일을 주문했다. 배달 기간 1주일이라고 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도 타일은 도착하지 않았다. 공공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위해 학생용 1년 교통정기권을 구입하려 했다. 서류 작성 뒤 3~4주 뒤에 정기권이 집에 도착할 거라고 한다. 거의 모든 부분이 초월적인 리듬으로 굴러간다. 대체 왜!


 우리가 “빨리 빨리”라고 말할 때, 이 사람들은 “시간을 충분히 가져”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서!” 하고 외칠 때 이들은 서두르지 말고 “부드럽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까진, 문화 차이에서 오는 속도에 대한 다른 감각이므로 존중해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건, 기업과 자본에 무한자유가 허락되는 신자유주의가 도처에 침투하면서다. 사람들의 습관은 바뀌지 않고, 휴가일수도 그대로인 대신 일하는 사람의 수는 전보다 절반, 혹은 반의 반으로 준 것이다. 인건비 감축이 기업가로선 가장 편리한 비용절감이니까. 


결국 노동자도, 소비자도 미칠 지경에 이르고 만다. 한국에서 온 사람뿐 아니라, 수십 년 이곳에 살던 프랑스인들도 구소련에서 벌어지던 일들의 이 기이한 재연을 탄식한다.


프랑스 북부 교외의 젊은이들 시위 (출처: 경향DB)


해법은 수익극대화라는 단 한 가지를 위해 모두가 희생해야 하는 이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파리 11구에 있던 슈퍼마켓 체인 모노프리 지점의 직원들처럼. 직원 모두가 최저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대단찮은 직장이었지만, 더 이상 비인간적 처우를 방관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두 사람이 하도록 방치하는 지점장은 노동력만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으로 직원들을 대했다. 손님들은 일상적으로 물건값을 지불하기 위해 20~30분가량 줄을 서야 했다. 38일 동안 파업을 했다. 주민 6000명이 지지서명을 했다. 노동총연맹(CGT)과 좌파전선의 지지도 얻었다. 파리시도 개입해 노사 간의 대화를 중재했다. 노동자들은 모든 요구사항을 관철하며 승리했다. 노동자도, 소비자도 웃으면서 이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자본가의 독식을 저지하는 것. 그 첫발은 정부가 내디뎌줘야 하건만, 집권 사회당은 불안한 출발을 보인다.


청년 실업률이 45%에 육박하는 프랑스 북부도시 아이앵. 청년폭동이 일어나자 취업 대안을 마련하는 대신 경찰력을 대거 투입해 이들을 진압·검거한 집권 사회당에 비난이 쏟아진다. 그건 지난 5년간 익히 보아온, 아주 쉽지만,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집권세력의 관성은 사회주의를 본질에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인가. 벌써 관찰의 시선을 걷고 대결과 압박에 나서야 할 때가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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