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브렉시트와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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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아침을 열며]브렉시트와 리더십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4. 22.

2차 세계대전과 전후 혼란기에 9년간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 ‘위대한 영국인’이다. 2002년 BBC의 100만명 대상 ‘100명의 가장 위대한 영국인’ 조사에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이작 뉴턴 등을 제치고 처칠이 1위를 했다. 그는 유럽통합주의자일까, 유럽회의주의자일까.


처칠은 1930년부터 ‘하나의 유럽’을 고민하고, ‘유럽합중국’을 구상했다. 1차 세계대전을 성찰하면서 유럽 내 이동과 상호 서비스를 활성화하고 각국이 자국의 보호적 조치를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럽평의회 건설에도 기여했다. 유럽연합(EU)은 홈페이지에서 이런 처칠을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초대 총리, 로베르 쉬망 전 프랑스 외무장관 등과 함께 ‘유럽통합의 아버지’로 소개한다.


그러나 처칠은 유럽통합 과정에선 입장이 모호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양차 대전을 겪으며 쇠락한 상태에서 그는 유럽을 ‘구질서’로, 경제성장이 폭발적인 미국을 ‘신질서’로 봤다. 정치적으론 ‘하나의 유럽’을 구상했지만 경제적으론 미국과의 단일 시장을 대안으로 여겼다. 영연방국가, 미국, 유럽과의 관계를 모두 고려한다는 이유로 유럽공동체 가입을 꺼렸다. 그가 유럽회의주의자로 평가받는 데 주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영국은 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에, 창설 6년 뒤인 1973년 가입했다. 영연방과의 네트워크에선 경제적 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영국은 가입 2년 만인 1975년 오일 쇼크로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자 EC 잔류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EC 틀에서 얻을 게 많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민 67%가 잔류를 선택했다. 2016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했다. 브렉시트는 영국이 양극화와 불평등에 대한 내부 불만을 ‘이게 다 EU 때문이야’라고 책임을 떠넘기면서 비롯됐다. 어쨌건 영국은 필요하면 EU에 남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발을 뺀다는 인상을 줬다. 현재 영국 브렉시트당 대표인 나이젤 파라지는 3년 전 “영국이 유럽과 대서양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언제나 대서양을 선택해야 할 것”이라는 처칠의 말을 인용해 브렉시트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자체를 평가할 생각은 없다. 브렉시트가 되면 영국은 한동안 혼란을 겪을 것이다. EU 내에서 회원국 간 물품·서비스·자본·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지만 새로운 조건으로 바꿔야 한다. 브렉시트에 부정적인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가 이참에 영국에서 분리·독립하겠다고 할 수 있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터져나올 수 있다. 나중에 최악의 오판으로 평가받는다 해도, 영국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국가의 백년지계를 논의하는 과정은 국제사회의 우려를 자아낸다. 정치는 제 역할을 못하고, 리더십은 실종 상태다. 브렉시트 날짜를 3월29일로 받아놨지만 의회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EU에 거듭 요청해 4월12일로, 다시 10월 말로 연기됐다. 가을이 되면 ‘미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까.


영국 정부는 3년 동안 사실상 올스톱 상태다. 브렉시트 이외의 다른 정책 현안들은 뒷전이다. 2017년 10월을 목표로 잡았던 사회복지 개혁 작업은 미완이다. 수년 전부터 칼을 사용한 범죄가 급증하면서 사회 불안 요소가 됐지만 경찰력 충원 등 관련 예산 확보가 되지 않고 있다. 인터넷 대책도 지지부진하다. 영국 언론들은 이런 사례들을 들며 정부가 기본적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디언은 ‘정부 부재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의회민주주의의 발원지라는 영국의 자부심은 나라 안팎에서 조롱을 듣는 처지가 됐다. 집권 보수당은 사분오열이다. 여당 의원들은 총리 말을 듣지 않고, 총리는 의원들을 적극 설득하지 않는다. 노동당 등 야당은 총리 흔들기에 바쁘다. 영국 의회가 브렉시트에 관한 수십 건의 표결을 진행했지만, 통과된 것은 ‘노딜 브렉시트’는 안된다는 것뿐이다. 영국은 암흑 터널 안에서 헤매고 있다. 처칠이 살아 있었다면 그의 사망 8년 뒤 유럽공동체 가입에 대해, 또 EU 탈퇴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처칠 같은 정치지도자가 없어 이런 총체적 난국에 빠졌을까.


리더십의 위기는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 정치 무대에서 기성정당은 외면받고 있다. 경제·사회적 위기에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주류 정치에 대한 심판이다. 유권자들은 정치적 선명성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반이민을 내세운 극우 포퓰리즘 정당, 이민·기후변화 등에 진보적 색깔이 분명한 녹색당이 동시에 지지세를 넓혀가는 것이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기성정당의 쇠락과 분열은 유럽 정치의 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


<안홍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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