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작은 ‘태양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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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아프간의 작은 ‘태양극단’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1. 3.

(연합뉴스) 프랑스 태양극단 연출자 아리안느 므누슈킨

2005년. 프랑스의 전설적 연출가 아리안 므누슈킨(Ariane Mnouchkine)은 탈레반 정권에 유린당하고, 미군이 벌여놓은 전쟁으로 벌집이 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자신이 이끄는 태양극단을 데리고 날아간다.
그리고 포탄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곳에서 100여명의 아프간 청소년들과 함께 연극 워크숍을 진행한다. 카불에 있는 아프간 국립극장은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벽엔 포환 자국으로 구멍이 숭숭나 있었다. 포환이 어디서 날아들지 언제 이 악몽이 끝날지 모르는 나라에서, 연극은 실신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 아프간 청소년들이 태양극단의 배우들과 함께 한 3주간의 경이적인 시간들이 지난 후, 이들의 가슴 속엔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올랐다. 아리안 므누슈킨은 바로 이 아이들을 데리고 아프타브극단을 탄생시켰다. 아프타브는 아프가니스탄 말로 ‘태양’이라는 뜻.

이때부터 파리의 태양극단과 카불에 있는 또 다른 작은 태양극단은 비행기를 타고 먼길을 오고 가며, 치열한 연극작업에 몰입한다. 아리안 므누슈킨은 자신이 가진 모든 문화적, 외교적, 정치적인 힘과 노력을 총 동원하여 20여명의 단원들이 파리의 태양극단에서 1년 가까이 연극 워크숍을 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이 태양극장에 와서 처음 가졌던 워크숍은 놀랍게도 한국의 살풀이 춤. 한국무용가 김리혜가 진행한 살풀이 춤 워크숍을 통해 전쟁의 포환 속에 움츠러들고 일그러진 영혼들이 비로소 자유로움과 평화를 맞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고 가면극과 소리, 몰리에르와 브레히트,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통해 자신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 처참함을 뛰어넘을 도약의 에너지를 얻었고, 이윽고 스스로의 텍스트를 쓰고 연출한 무대를 카불에서 선보이며, 아프간 사람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전했다. 6년 동안 이들은 네번에 걸쳐서 프랑스에 와서 연극 워크숍을 통해 새 삶을 얻었고 프랑스 전국 순회공연을 통해 그들이 받은 것들을 또 다른 감동으로 전해주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르카를 두르지 않은 여자가 무대에 서서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고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연기를 한다는 것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 정치를 말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된다. 아직도 끊나지 않은 언제 도대체 끝날지 모르는 전쟁 속에 이들은 복수와 응징의 칼을 갈고, 누군가의 허무한 하수인이 되는 대신 창작의 주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주인이 되는 소중한 경험들을 쌓으며 더 큰 도약을 위한 에너지를 생산해 내며 만방에 그것을 전했다.

초등학생에게까지 전국 등수를 알려주고야 마는 광적인 경쟁주의, 무엇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학교로, 수많은 학원들로 끌려다녀야 하는 아이들, 무지막지한 게임의 홍수 속에서, 점점 현실의 경험과 차단당하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우리 아이들 역시 포환이 우수수 머리 위에 떨어지는 환경 속에 장시간 방치돼 온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는 상처입고, 혹은 죽고, 또 누군가는 가해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이 미친 경쟁 사회라는 방사능이 일으킨 부작용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똑같은 피해자일 뿐.
어쩌다 가해자라는 역할을 맡게 된 아이들을 성급히 단죄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왕따라는 속수무책의 바이러스를 야기한 방사능을 차단하는 일이다. 경쟁과 성적, 등수라는 바삐 돌아가는 선반 위에서 아이들부터 내려주고 모두 거기서 한발자국씩 물러나 생산이니 경쟁, 효율 따위를 잠시 잊고 살풀이 춤에, 꽃향기에, 고전의 묵직한 매력에 우리의 몸이 반응하도록 놔두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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