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붕괴 끝에 받은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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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정신의 붕괴 끝에 받은 성적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1. 17.
목수정 | 작가·파리 거주

 
올 것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신용등급평가기관 S&P는 지난 금요일 프랑스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계단 강등했다. 대선을 불과 100일 앞둔 시점. 프랑스의 신용등급 하락은 지금까지 이 나라를 거칠게 자기 방식으로 몰아붙여 온 사르코지에 대한 성적표이다. 

프랑스 사회당 대표 마르틴 오브리는 “프랑스가 놓치게 된 신용등급 AAA는 2007년부터 사르코지가 실시해 온 정책에 대한 결정적 평가이며, 사르코지는 프랑스 신용등급을 하락시킨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며 현 상황을 일갈했고, 리베라시옹지는 ‘프랑스 신용등급 강등’이란 표제 아래 S RKOZY,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나가 쓰러져있는 A를 표지로 장식함으로써 이 사건의 함의를 명백히 했다.

프랑스의 한 외환 딜러가 13일 유로화가 장중 급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유로화는 이날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프랑스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할 것이라는 보도로 17개월 만에 달러화 대비 최저가를 기록했다. (AP 연합뉴스)

 

‘강등(Degradation)’은 이미 수년 전부터 유령처럼 프랑스를 배회하던 말이다. 21세기에 들어, 프랑스는 거침없이 아래로 질주하고 있었다. 인권도, 관용도, 연대의식도, 심지어는 그 애틋하던 예술에 대한 취향마저 거추장스럽다며 던져버린 듯했다.
프랑스가 수세기 동안 쌓아올린 빛나는 정신의 유산들을 정신없이 잃어가는 동안, 한편에선 금융자본주의에 간과 쓸개를 모두 내주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유로존이 완성되고, 과연 누구를 위해, 어디로 가는 마차인지 손을 들어 물어볼 수조차 없는, 묻지마 신자유주의 유럽이 급속도로 질주하는 동안, 정신적인 쇠락의 홍수 속에 사람들은 잠기고 만다. 그러면서도 마치 우리가 지금의 희생을 감수하는 대신, 어디선가 돈의 힘으로 강력한 유럽이 만들어지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헛된 망상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또 다른 동맹군이던 미국의 신용등급평가 기관이 강등된 성적표를 프랑스 코앞에 내미는 순간, 허망한 신기루는 무너져 내리고 만다. 프랑스식으로 추락하지만 미국식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간사한 믿음, 그 믿음을 뿌리던 전도사의 실체를 이제 프랑스 사람들은 알아챘을까?

반짝이던 트리플 에이 그룹에서 내려온 프랑스는 이제 어디로 갈까? 사르코지는 신용등급 강등을 ‘더 강력한 긴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집권 초기부터 그가 아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마치 지나가는 사내의 옷을 벗기지 못한 것이 바람을 더 세게 불지 못한 탓이라며, 마지막 힘을 다해 바람을 불려 하는 구름처럼. 교원 수 삭감, 병원 폐쇄, 사회보장 축소…. 실업은 늘 것이고, 세수는 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부자들과 대기업 세금감면은 지속되어, 국가부채는 더 커지는 악순환 고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은행을 살리기 위해 국고를 털었건만, 은행들은 국가를 위해 한푼도 협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등된 신용등급으로 더 큰 이자를 국가로부터 챙기면서, 투자자들의 주머니를 불릴 뿐. 신자유주의는 그 파렴치한 진면목의 극치를 보여주고야 말 것이다.

이게 악몽의 마지막 장면이 되게 하는 방법은 물론 있다. 이제 그만 해에게 기회를 주는 것. 구름으로 해결이 안된다는 걸 알았다면. 모두를 따뜻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저 돈 많은 나그네의 옷을 벗겨줄 ‘해’. 모두의 돈으로 은행이 아니라 국민들을 살리는 해법을 제시하는 ‘해’가 권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악한 은행들을 국유화하고, 모두의 돈을 교육과 문화와 의료와 대체에너지 같은 삶을 다시 구축하고 정신을 고양하는 데 기꺼이 지출할, 이로써 삶의 온기를 온 국토에 지피는 그런 권력. 온 국민을 살리는 그런 보편타당한 사랑과 풍요를 모두에게 안겨 줄, 저 붉게 타오르는 생명의 근원인 해는 프랑스에도 한국에도 있다. 우린 다만 그토록 당연한 행복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믿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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