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지하철 ‘유일 요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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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파리 지하철 ‘유일 요금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12. 6.

한 사회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돌아가는지 알아보는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그 나라 대중교통이 얼마나 편리하고 조직적으로 설계돼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한달 전 다녀온 카사블랑카. 인구 300만의 대도시임에도 버스 몇대와 택시가 대중교통의 전부여서 여전히 왕이 통치하는 나라 모로코의 까마득한 민주화지수를 체감할 수 있었다.

10여년 전 처음 파리에 왔을 때, 손바닥만한 파리시내(서울의 4분의 1)를 물샐 틈 없이 연결하는 14개의 지하철 노선으로 시내 어디든 갈 수 있어 탄복했던 기억이 있다. 버스들도 난폭운전 없이 부드럽게 움직여서 여유가 있을 땐 버스를 타고 시내구경을 하는 일도 큰 즐거움이고 파리시내를 통과하는 5개 노선의 장거리 시외선(RER)이 있어, 베르사유궁 같은 외곽도 지하철 티켓 한 장이면 휑하니 다녀올 수 있다. 5만원 정도면 살 수 있던 한달 정기권은 무제한으로 버스, 지하철을 탈 수 있어 물 만난 고기처럼 곳곳을 탐험할 수 있게 해줬다.
이래서 선진국인가 싶을 정도로 교통편의에서는 흡족했다. 비록 학생들에겐 대중교통이 무료인 독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렇게 잘 구축된 하드웨어를 가졌지만 파리의 대중교통 질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도무지 시민들의 편의 따위는 안중에 없는 지도자 탓이라고 굳이 말하진 않겠다. 2~3년 전부터 지하철역에 표파는 사람이 없는 역이 늘어나더니 2011년 현재, 거의 모든 매표소에 표파는 사람이 없다. 관광객이 사철 들끓는 이 도시에서 표를 구입하려 말 없는 기계와 씨름하는 관광객들을 무수히 목격한다.

지하철 노선마다 있던 고객서비스 센터는 하나로 통합됐다. 고객들이 불편해하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란다. 특히 수송량이 포화상태에 이른 지 오래인 RER는 파리외곽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 허구한 날 멈춰서는 RER 속에서 시민들의 희망도 삶도 시시각각 내려앉고 말았다. 시설 보수와 선로 증설을 요구하는 노조의 파업과 시민단체들의 요구가 멈추지 않고 있고, 언론들도 시시때때로 도대체 “언제까지…”하며 한숨을 늘어놓았다.

그러던 중 바로 어제 사회당과 녹색당이 흥미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지하철 정기권에 부과된 권역별 가격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멀수록 집값이 싸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먼 곳에서 일을 하러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 파리, 즉 1-2존에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한달 정액권으로 약 9만원을 낸다면, 1-5존을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약 17만원을 내야 했다.
이것을 1-2존 기준으로 통일해 외곽 거주자들이 승용차로 이동하는 비율을 낮추자는 게 녹색당 생각이고, 선거철을 맞은 사회당이 대범한 개혁에 냉큼 동의한 것이다. 내년에는 시범적으로 주말에만 유일 가격제가 실시되고 2013년부터 본격 발효된다.

“이 정책이 가동되면 5억유로가 기업인들의 세금에 부과돼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경제위기의 시기가 아니냐”고 프랑스 예산부장관은 일침을 가한다. 예산부장관의 말은 동시에 지금까지 5억유로를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에서 털어왔다는 걸 실토하는 셈. 모자라는 돈은 부자들한테 거둬서 메꿔라. 위기도 어차피 그들이 만든 거 아니냐는 게 이 개혁의 숨은 뜻이기도 하다.

사르코지는 연간 이동하는 비용만 혼자서 2000만유로를 쓴단다. 금방 계산이 나온다. 이제서야 수도권 지역에서 대중교통문제가 표에 직결된다는 걸 갑자기 깨달은 사르코지.

그도 가장 낙후되고 사용량이 많은 RER A선의 증설을 약속했다. 그동안은 미처 몰랐다는 듯이. 발 달린 자라면 누구든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하는 정치. 이거 민주주의의 기본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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