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재에도 끄떡없는 양안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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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오관철의 특파원 칼럼

악재에도 끄떡없는 양안 관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11. 5.

모처럼 조성됐던 남북 대화 분위기가 국내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소동으로 얼어붙었다. 돌발성 악재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남북 관계는 최근 줄지어 터진 악재에도 끄떡없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2008년 대만에서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이 집권한 후 양안 관계는 차이완(차이나+타이완의 합성어) 시대로 불렸다. 하지만 양안 관계가 삐걱거릴 수 있는 악재들이 잇따라 터졌다. 전단 살포 소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먼저 마 총통의 홍콩 민주화 시위 지지 발언이다. 그는 지난달 10일 대만 건국기념일 연설에서 “민주주의와 법치는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권리”라며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를 주창해 온 대륙의 지도자들을 건드렸다. 지난 9월 말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는 “대만은 중국이 홍콩을 지배하는 식의 일국양제(1국가2체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며칠 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대만 경제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국양제 방식의 통일을 강조한 데 대한 반박 성격이 짙었다. 친중 노선을 걸었던 마 총통으로선 이례적 발언이었다.

여기에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지난달 27일 대만 정보기관이 중국 유학생들을 상대로 포섭공작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도, 대만을 자극했다.

마 총통의 발언에 대해서는 중국이, 간첩 포섭 보도에 대해선 대만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양안 관계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하지만 대만은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며, 시 주석은 대표단을 접견하기로 돼 있다고 대만 언론이 전했다.

중국에서 마 총통의 발언을 두고 최고존엄을 모독했다는 식의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시 주석은 지난 1일 푸젠(福建)성의 양안 경제통합 시범지구인 핑탄(平潭))종합실험구를 방문해 “양안은 같은 조상과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피는 이어져 있고 문화는 서로 통한다. 함께 손을 잡고 발전하고 융합발전하지 않을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대만에 대한 배신감과 서운함을 접고 양안 관계에 금이 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대만의 마잉주 총통이 파라과이의 카르테스 대통령과의 만남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_ AP연합


한때 남북 관계는 양안 관계에 비해 훨씬 뜨거웠다. 중국과 대만이 65년 만에 장관급 회담을 가진 게 지난 2월이다. 양안 정상회담은 1949년 분단 후 열린 적이 없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1992년 남북 총리 간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고 2000년과 2007년에 두 차례 정상회담이 열렸다.

물론 양안 관계와 남북 관계를 단순 비교하긴 힘들다. 양안 간에는 핵 문제도 없고 중국은 30여년 전부터 개혁·개방에 나서 대만과 경제적으로 주고받을 게 있다. 그러나 양안이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얼음장 밑에서 물이 흐르듯 꾸준히 교류를 이어온 것은 인내를 빼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넘어온 뒤 줄곧 유지해 오던 3불 정책(접촉하지 않고, 회담하지 않으며, 타협하지 않는다)을 깬 것은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이었다. 그는 1987년 11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대만 주민의 대륙 친척 방문을 허용하면서 양안 관계에 물꼬를 텄다. 죽음을 불과 2개월여 앞둔 시점이었다.

이후 큰 대륙과 작은 섬은 선경후정(先經後政·경제가 우선이고 정치는 다음이다), 선이후난(先易後難·쉬운 일이 먼저고 어려운 일은 나중이다)을 원칙으로 지혜로운 공존을 모색해 왔다.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대만 독립문제를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지지만 인적·물적 교류 장벽은 무너진 지 오래됐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성실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만 있으면 그게 통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호불호는 엇갈리겠지만 남북 관계의 금과옥조로 삼아도 좋을 말인 듯싶다.


오관철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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