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화해와 불편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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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미·일 화해와 불편한 역사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5. 12.

“역사는 미·일 양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우리 생각이다. 역사는 굉장히 폭이 넓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전에 미국을 다녀간 한국의 외교당국자는 ‘일본 정상이 미국 의회를 상대로 연설할 때 한국, 중국에 했던 잘못에 대해 얘기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 정부는 아베의 연설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발언을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움직였다. 아베가 ‘아시아에 끼친 피해’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의 노력은 절반쯤 성공했다.

1941~1945년의 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싸움이었지만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도 고통 받았다. 한국 정부가 일본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 뭔가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미국이 일본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이 전쟁을 종결하고 전후처리를 한 방식이 결과적으로 일본사회의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한국 등의 민족주의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을 맞은 1995년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B29 에놀라게이를 전시하려는 계획이 추진되다가 참전군인들의 반발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에놀라게이는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전략폭격기다. 큐레이터들은 에놀라게이와 함께 버섯구름, 지상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수십만명의 희생자, 핵군비경쟁의 촉발 등을 담담하게 보여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치인들은 이러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줘서 ‘핵무기 사용이 꼭 필요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 상원의회는 에놀라게이의 워싱턴 입성을 막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매년 8월이면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는 일본 총리 참석하에 미국의 핵폭탄에 숨진 영령들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린다. 평화기념관에는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사연들로 가득하다. 몸의 형체가 순식간에 재로 변하거나 얼굴 형체가 없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뛰어들 강물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사진과 사연들을 봤을 때의 느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중엔 한국인 희생자도 수만명에 달했다. 평화기념관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맞춰져 있다. 하지만 무엇이 그 비극을 초래했는지는 자세한 서술이 없다. 일본 군국주의 비판과 핵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에 대한 원망이 아주 조금 보일 듯하다가 이내 추상적인 평화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평화기념관을 관통하는 감정은 ‘피해자 의식’이다.


일본인들은 아시아 침략의 가해자라는 정체성보다 군국주의와 미국에 의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다. 이른바 ‘이중의 피해자 의식’이다. 전후 미국이 주도한 도쿄전범재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피해자 의식도 강화했다. 이후 미국은 미·소 냉전에 대응하기 위해 천황제를 유지하고 전범들을 복권시켰다. 그렇게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로부터 70년. 아베로선 국내의 중국 위협론을 활용해 보통국가로 한걸음 더 내디뎠고, 미국으로선 어느 총리보다 장기집권하며 중국 견제, 세계적 문제에 대한 통 큰 지원 등 미국의 민원을 모두 들어주는 아베 총리가 기특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따져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미국이 일본에 가혹할 수 없는 데는 과거사를 깊이 캐면 캘수록 자신의 책임이 뒤따라 나오게 돼있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미·일 시민들이 진정으로 과거를 극복하고 화해하는 것을 반대하기보다 지지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자면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의 역사 교육도 중요하다. 역사는 폭이 넓고 깊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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