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한 두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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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한 두 여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10. 26.
며칠 전, 파리 마레지구를 가로지르는 프랑 부르주아 거리를 친구와 함께 지나고 있었다. 앞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중년여인이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걸어온다.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건만, 고단한 삶에 질식당한 자의 소리없는 비명이 흘러나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철인3종 경기의 마지막 레이스를 간신히 달리고 있기라도 하듯 지치고 괴롭지만, 이를 악물고 터벅터벅 길을 걷던 그 여자의 이름은 안 싱클레어. 이제는 세계적인 난봉꾼으로 전락한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의 아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누구의 아내로 불리진 않았다. 1980년대 프랑스 국영방송국 TF1에서 정치인들을 초대해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면서 강렬한 푸른 눈빛과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정치인들의 아킬레스건을 민감하게 건드리며 지성과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탁월한 방송인이었다. 

1997년 남편 스트로스 칸이 재무부 장관 자리에 오르면서 자진해서 방송 진행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e-TF1의 대표로 임명될 만큼 방송인으로서 정상의 시절을 누렸다. 그녀는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상의 손녀로 막대한 유산 상속자이기도 하다. 스트로스 칸과 결혼한 후에는 자신의 재력과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남편 대통령 만들기에 주력해 왔다. 뉴욕 소피텔호텔 성폭력 사건으로 구속된 남편의 보석금으로 600만달러를 선뜻 지불한 것도 그녀였다. 

소피텔 사건 이후, 무조건 남편의 결백을 믿고, 그를 지지하며,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안 싱클레어를 두고 프랑스 보수언론은 그녀를 새로운 우상으로 만들어냈다. ‘남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는 작은 병정’ ‘이상적인 아내’ ‘사랑에 빠진 여전사’ 혹은 남자의 모든 허물을 감싸다가 그 대가로 그를 대신해 독배를 들이켜야 했던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 ‘안티고네’에 비유되기도 했다. 

한때, 충만하던 지성과 번뜩이던 총기는 권력을 향해 부활할 것을 꿈꾸는 남자를 위해 위대한 희생과 인내를 보여주는 착한 아내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추앙되면서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그녀였다. 그러나 한 남자의 그림자가 될 것을 선택한 후에는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최고 권력을 손에 쥐려는 남자의 조력자가 되어 삶의 주어를 잃어버린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앵커 시절의 카리스마도 강렬한 눈빛도 없다. 

함께 그녀를 목격했던 친구는 말했다. “자신의 엄청난 부를 가지고도 한 조각 행복을 살 수 없었던 그녀의 몰골을 보라”고. 순간 내게 겹치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연일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선 한순간도 자신의 욕망의 주체였던 적이 없는 자의 공허가 보인다. 종종 그녀의 문장에 주어가 빠져 있듯이 그녀의 계급이, 그녀를 지배해 오던 가부장들이 등 떠미는 곳으로 나아가 앵무새처럼 지저귀고, 인형처럼 방긋방긋 웃는 그녀. 그녀의 모습 뒤엔 자기 욕망의 진정한 주체가 되지 못한 자의 허무가 가득하다. 

안 싱클레어가 큰 선글라스 뒤로 결코 감추지 못한 바로 그.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욕망들을 향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그녀들.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그 한 조각 행복을 무슨 수로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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