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커버그 기부의 불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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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저커버그 기부의 불편함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2. 13.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의 통 큰 기부가 화제다. 자신의 지분 중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니 칭송이 자자하다. 이런 뜻을 밝힌 대부호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들에 대한 찬사는 부러움까지 더해진 듯하다. 그러나 그런 칭송과 부러움은 아직 섣부르다. 미국 갑부들의 기부가 그리 훈훈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먼저, 저커버그의 기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부가 전혀 아니다. 기부로 ‘유한책임회사(LLC)’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선단체가 아닌 엄연한 투자회사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상속세를 내지 않고 자녀에게 지배권 양도를 할 수 있고, 또 막대한 절세효과를 누릴 수 있다. 저커버그로서는 꿩 먹고 알 먹기다. 겉으론 생색을 내며 온갖 칭송을 다 받고 실속은 알토란같이 챙기니 말이다. 뉴욕타임스도 이번 기부가 “돈을 이 호주머니에서 저 호주머니로 옮긴 것”일 뿐이라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런데 기부를 가장한 이런 저커버그식 실속 챙기기는 이제 미국 갑부들에겐 새로운 트렌드다.

둘째로 이른바 ‘자선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에 대한 강한 회의다. 그것은 아낌없이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자가 어떤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아젠다를 만들어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것을 말한다. 빌 게이츠는 에이즈 퇴치와 기후변화 억제, 그리고 저커버그는 인류 잠재력의 진보와 같은 아젠다를 만들어 사회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선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자선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극소수의 경제 엘리트에 의한 ‘과두제’(oligarchy)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부호가 금권력을 이용해 사회·정치적 권력까지 장악하는 것이다. 정치가와 행정가도 아니면서 돈 많이 가졌다고 사회적 합의로 도출되어야 하는 아젠다를 선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자선자본주의’는 극소수의 부호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세상을 바꾸며 결국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불온한 야욕이 숨겨져 있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가 부인 프리실라 챈과 함께 갓 태어난 딸 맥스를 품에 안고 있다. 이 사진은 저커버그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1일(현지시간) 공개한 것이다._ 저커버그 페이스북 캡처


세 번째로는 백번 양보해서 부호들의 이런 기부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손 치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국가나 사회가 소수의 부자들에 의한 이런 기부에 의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부자 기부보다 부자증세가 먼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부자들이 교묘히 법망을 피해 탈세와 절세를 못하게 하고, ‘낙수효과’라는 미명하에 부자들의 징세의 짐을 덜어준 부조리한 세법만이라도 고친다면 그까짓 부자들의 기부는 아예 필요도 없다. 정의로운 공평과세의 필요성이 기부의 필요성을 능가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사회의 결실을 승자가 다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사회를 수정할 필요성이 부자들의 기부에 주목한 나머지 묻히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기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회구성원이 그 결실을 비교적 골고루 가져가는 사회가 극소수의 부자가 기부로 생색내는 사회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국의 부자들은 그들이 노력한 것 훨씬 이상의 결실을 독식하고 있다. 기부도 좋으나 그 이전에 재산을 어떤 식으로 벌고 늘렸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하에서 그것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부자들이 쉽사리 그들의 부를 천문학적으로 불리게 하는 시스템을 교정할 필요성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부호들의 기부가 자칫 이런 문제를 호도할 수 있다.

‘자선자본주의’란 미명하에 선의로 치장된 부자들의 기부는 마냥 넋 놓고 찬미하고 부러워할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극소수 부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동원한 사탕발림일 뿐이다. 오호라. 누가 그들의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를 멈출 수 있을 것인가?


김광기 | 경북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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