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아내의 ‘구원 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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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특파원칼럼]아내의 ‘구원 등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11. 16.

1991년 흑인으로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연방 대법관에 지명된 클래런스 토머스는 법관으로서의 판결보다 인준 청문회로 더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토머스를 대법관으로 지명한 직후 그가 과거 부하직원들을 상습적으로 성희롱했다는 추문이 불거지면서 상원 인준이 불투명해졌다.


그해 10월10일 토머스와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한 피해자가 함께 증언대에 섰다. 법관 출신의 토머스와 법대 교수인 흑인 여성 애니타 힐이 벌인 사흘간의 대결은 폭발적인 관심 속에 공중파 TV로 생중계됐다. 때마침 청문회와 같은 시간에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가 벌어지고 있어서 많은 시청자들은 TV를 2대 갖다놓고 고개를 돌려가면서 야구경기와 청문회를 지켜봤다. 


 토머스는 흑인노예의 후손인 부모, 할아버지를 증인석 옆에 앉혀놓고 모두발언을 했다. 조지아주의 흑인촌에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하고 농사일 외에는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을 소개하면서 “이분들이 나에게 준 유일한 ‘교육’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한 연설이었다. 특히 상원 법사위원과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토머스의 흑인 가족들 사이에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의 백인 아내 버지니아였다. 그의 인준 투표는 52 대 48로 통과됐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힐러리 부부의 사진 (출처; 경향DB)


성추문에 휘말린 유명인들이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아내를 동원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부터 대통령이 된 이후까지 성추행 의혹,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으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의 부인 힐러리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말을 대중에게 했다. 성폭행 혐의로 기소됐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의 부인 안 생클레르도 남편을 적극 옹호했다.


지난 14일에는 4건의 성희롱과 성추행 의혹을 받으며 곤경에 처한 공화당 대선주자 허먼 케인의 아내 글로리아가 남편을 구하기 위해 언론 앞에 나섰다. 그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남편의 성추행 의혹은 내가 43년 동안 함께 살아왔던 그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추문에 휩싸인 남편을 위한 ‘아내의 구원 등판’은 이젠 고전적 수법이 됐지만 효과는 여전히 좋은 편이다. 남편의 성추문에 가장 상처받았을 아내가 의연한 모습으로 변함없는 신뢰를 표시하고 적극 옹호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내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아내의 말이 곧 ‘성추문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순종적이고 착한 아내’를 동경하는 남성들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판타지를 원하는 대중은 은연중에 아내의 편이 되고 이 같은 감정은 곧 남편에게 향한 의혹의 눈길을 거두게 만든다. 


그런데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민망하고 거북살스러운 언론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는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믿어주고 덮어줌으로써 남편의 야망과 가정을 지킬 것인지, 배신의 분노를 숨김없이 폭발시킬 것인지 갈등하지는 않았을까. 실제로 남편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고 여전히 신뢰하고 사랑하는지, 아니면 패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려 어금니를 꼭 깨물고 카메라 앞에 섰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유명인의 아내된 여자들이 측은할 따름이다. 사고는 자기가 치고 문제가 커진 뒤 아내를 등장시켜 자신에게 향한 의혹과 대신 싸우게 하는 못난 정치인들은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한다.


<유신모 위싱턴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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