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합의 연출자,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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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위안부’ 합의 연출자, 미국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 5.

‘윤병세-기시다 합의’ 직후 미국 국무부 당국자는 익명을 전제로 미국 정부 입장을 전화회의 방식으로 언론에 설명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기뻐하는 미국 정부의 표정은 전화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데 시민단체나 피해자 본인들이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영향을 받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나는 국무부 당국자가 ‘양국 정부와 시민들이 결정할 문제’라 대답하고 그칠 줄 알았다. 의외로 답변이 계속 이어졌다.

“민주적인 두 정부가 합의한 어떠한 것도 표현·집회의 자유라는 보편적 인권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기념비적인 합의의 중요성을 양국 시민들이 놓쳐서는 안되고, 양국 화해를 독려하고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자극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이제 양국민들이 정부 시책에 따라 국제무대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출한 것이다. 아시아정책포인트의 민디 코틀러는 “미국이 표방해온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스스로 중시하는 표현의 자유나 인권의 가치를 제약할 여지를 무릅쓰고 양국 시민들에게 지침까지 제시한 것은 이번 합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준다. 미국이 한·일 양측에 이번 합의를 압박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몇년간 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 다양한 급에서 한·일에 화해를 권유했다. 양국이 이 문제에 가로막혀 군사정보공유나 미사일방어(MD) 등에서 충분히 협력하지 못하는 것을 미국은 불만스러워했다. 미국은 한·일관계 경색을 중국의 부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 장애물로 여겼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사의 후과를 이해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이런 셈법은 반세기 전 한일기본조약 때도 비슷했다.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던 때였지만 한국인들의 감정은 중요한 고려 요인이 아니었다. 협상 착수 후 13년이 되도록 진전이 없자 미국은 1964년 박정희-사토 에이사쿠 정권을 압박해 협상 타결에 역할을 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빅터 차의 ‘한·일관계 정상화의 배경’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이 한·일 화해를 종용했던 것은 공산 중국의 위협과 베트남전의 교착 상태 등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부담이 늘어가던 전략적 상황 때문이었다.

1965년과 2015년 합의의 주체는 한국, 일본 정부이지만 두 경우 모두 미국이 연출자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동북아에 대한 군사주의적인 접근이 계속되고 한·일이 미국이 지어놓은 건축물 속에 사는 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2차대전과 전후 처리에서 생겨난 과거사 문제들이 해결되기 어렵다고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미 국방부 입장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국의 일본사연구 권위자 존 다우어가 패전 직후 미군의 일본점령기를 다룬 저서 <패배를 껴안고>에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내용이 나온다.

미군 점령군의 진주 직후 일본 내무성은 비밀리에 전국 경찰에 무전을 보내 각지에 점령군 전용 특수위안시설을 설치하라고 지시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미·일은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만들어 미군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RAA의 한 여성은 하루에만 스물세 명의 미군을 상대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2차대전 후 미군이 참가한 전쟁들을 생각하면 이런 일이 일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합의가 ‘주어진 조건하에서 양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합의’였다는 일각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했던 ‘우리’들이 순진했던 것일까.


워싱턴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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