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짐 체인지에 기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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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레짐 체인지에 기댄 외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6. 23.

“이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북한 핵만큼이나 풀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

오랜 경력의 한 외교관이 이런 비교를 한 적이 있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 문제를 놓고 외교적으로 소원해지고, 국내 한 여론조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호감도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보다 좋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을 즈음이다. 사안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워낙 다르고,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피차 국내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이 비슷하다는 얘기였다. 박근혜 정부가 보기에는 아베가 통 크게 반성하고 책임지면 되고,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기자에게는 또 하나 비슷한 점이 보였다. 박근혜 정부가 내심 일본과 북한의 ‘레짐 체인지(정권교체)’에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나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이 아베 자민당 내각의 교체나 김정은 제1비서의 궐위에 기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박근혜 정부가 바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면 그랬다. 그것은 외교적 해법의 공간이 매우 작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임기 초반 일본과 북한에 대한 단호한 태도로 국내 지지율에서 재미를 많이 봤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미·중으로부터 모두 러브콜을 받는 등의 ‘축복’을 활용해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상대의 잘못을 탓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능을 덮을 수 있는 시점도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말을 안 듣는’ 일본과 북한에 대해 채찍과 당근을 모두 써봤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로 미국 정부나 학계 등을 지렛대로 해서 이뤄졌다. 한·미동맹은 그런 곳에 쓰였다.

그런데 미국이 한·일관계와 북한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는 서로 달랐다. 한·일관계는 역사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부상이라는 전략적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동북아에 새로운 질서를 짜는 현실 정치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한국이 너무 나가지 말라는 식이었다. 미 당국자들은 한국에 ‘아베가 못한다고 쥐어박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면 잘한다고 치켜세워주며 격려해줄 수는 없느냐’고 말했다. 반면 미 당국자들은 박근혜 정부에 김정은에 대해서는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다. 미국으로선 ‘실패한 국가’ 북한으로 인해 동북아가 화약고가 돼 전쟁에 이끌려 들어가는 상황만 아니라면 지금처럼 북한이 문제를 적당히 야기하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는 ‘사드 배치 여부와 시점은 결국 북한이 결정할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말들이 넘쳐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이 22일 도쿄 총리관저를 방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함께 아베 총리의 선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외무상의 사진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지난주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렸다면 한·일관계와 북한 문제가 중요한 의제였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미국에 오지 않았음에도 정부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미국이 바라는 그림대로 가고 있다. 위안부 문제의 전망이 여전히 밝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는 일본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를 ‘극적으로’ 타협할 수 있었음을 부각하며 한·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장기과제로 치워둘 경우 체면을 살리는 출구전략으로 군함도 문제를 키운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반면 북한 문제는 다음 ‘도발’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하는 일이 없다. 워싱턴에서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 호응한다며 ‘한반도 통일’을 논의하는 공식 또는 비공식 토론회가 자주 열리기는 한다. 회의 예산은 써야 하는데, 비핵화는 어렵고 복잡하니 통일이라는 주문 뒤에 숨는 식이다. 논의의 초점은 대부분 ‘통일 이후’에 맞춰지고 정작 어떻게 통일로 갈 것인지는 빠져 있다. 미국의 한 한반도 전문가는 말했다. “한국이 미국에 와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해 달라고 하는데, 늘 궁금하다.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도와달라는 것인가.”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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