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DS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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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ISDS와 민주주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6. 2.

고래·바다표범 등 각종 수중생물의 서식지로, 대구잡이가 주요 산업인 캐나다 동부의 노바스코샤주 딕비넥 해안이 시끄러워진 것은 2002년 미국계 채광업체 빌콘이 들어서면서다. 빌콘은 2002년 이 지역에 풍부한 현무암 골재 채취를 위해 152㏊의 채석장과 선착장 건설을 허가해달라고 주정부에 신청서를 냈다. 환경단체들은 생태계와 지역민 생계수단이 파괴된다며 지역민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폈다. 빌콘은 이 사업이 이 지역 세수와 일자리를 늘려줄 것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노바스코샤 주정부는 중앙정부와 함께 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쳐 사업을 허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빌콘은 이 결정으로 1억8800만달러의 손해를 봤다며 2008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투자자-국가분쟁해결(ISDS) 조항에 의거해 NAFTA 중재법정에 캐나다 정부를 끌고 갔다. 중재법정은 지난 3월 빌콘의 손을 들어줬다. 애초 캐나다 정부가 투자를 독려해놓고 나중에 환경 법령 등을 이유로 빌콘의 신청을 불허한 것이 최소대우기준(MST)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빌콘은 캐나다 정부에 요구하는 배상액을 3억달러(약 3340억원)로 늘렸다.

5조원대의 론스타 ISDS 관련 업무에 관여한 한국 정부 관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ISDS는 “외국 투자가가 나라 같지 않은 나라에 투자할 때 해당국의 얼토당토않은 정책으로 손해 보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다. ‘나라 같은 나라’들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ISDS는 자유무역 체제를 주도하는 미국이 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투자보장협정(BIT)을 맺을 때 꼭 포함시키는 조항이다. 미국 기업인들이 세계 어디에 가서도 마음 놓고 사업 할 수 있도록 각국의 투자 관련 법령을 표준화하려는 의도이다.

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열린 '론스타 ISD 쟁점 설명회'에서 노주희 민변 국제통상위원이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하지만 미국과 비슷한 법제를 가진 캐나다 정부가 미국 기업에 패한 사례는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권에도 경각심을 안겨줬다. 미국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이 사례를 거론하며 “이제 캐나다 정부는 또다시 외국 기업이 접근해와 국토의 일부를 폭파하는 허가를 내달라고 하면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같은 당 중진 하원의원 샌더 레빈은 이번 중재 결정을 충격적이라고 평가하고 “모호한 최소대우기준을 투자자에게만 유리하게 해석해 캐나다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한 결정은 미국 정부가 얘기해온 최소대우기준의 의미와도 다르다”고 지적했다.

캐나다 납세자들이 미국 자본에 당한 일을 미국 정치인들이 역지사지로 바라보게 된 것은 이타적이어서가 아니다.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 투자자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지지층인 노동자, 서민들의 견해를 대변한다. 집권당의 유력 정치인들뿐 아니라 민주당 의원 90% 정도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 중인 거대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미국의 자유무역 정책이 어느 때보다 기로에 서있다.

근저에는 지금까지 미국이 참여한 최대 FTA인 NAFTA가 지난 20년간 서민들에게 가져다준 환멸이 있다. 개도국과의 가격 경쟁으로 미국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했고 무역으로 발생한 이익은 고루 나눠갖지 못하고 상위 계급에 돌아갔음이 분명해졌다. FTA의 협상대표가 국가대표로서 쟁취하겠다던 ‘국익’은 국민의 이익이라기보다 자국 기업의 이익이었던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에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거대자본의 이해를 대변해온 공화당과 힘을 합쳐 TPP를 추진하고 있다. 오바마는 TPP가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FTA’라는 역설적 표현까지 써가며 정치적 자원을 쏟아부을 태세다. 상원의원과 대선후보 시절 NAFTA에 비판적이던 오바마의 변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에도 한·미 FTA를 추진한 것만큼이나 ‘연구 주제’다.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가 어떻게 서민 삶을 개선하느냐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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