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와 인종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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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앵무새 죽이기와 인종주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7. 14.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 이후 55년 만에 처음 내놓는 소설 <파수꾼(Go Set a Watchman)>이 야단스러운 ‘스포일러’와 함께 미국 시간으로 14일 서점에 깔린다. <앵무새 죽이기>의 초고에 해당하는 <파수꾼>은 58년 전 ‘완전히 다시 썼으면 좋겠다’는 출판사 편집자의 권유로 사장됐지만 최근 재발견되어 출간하게 됐다.

지금은 없어진 리핀코트 출판사의 편집자 테이 호호프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파수꾼>을 출간하지 않은 이유로 “완성된 소설이라기보다 일화의 나열 같았다”고 말했다. 30대 초반 하퍼 리가 50대 후반 베테랑 편집자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2년여 집필을 거쳐 내놓은 책이 <앵무새 죽이기>다. 초고의 20대 여주인공은 여섯 살 소녀가 되어 홀아버지, 오빠와 함께 앨라배마주 시골마을에서 살았던 시절을 회고했고, 화자는 전지적 작가에서 1인칭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이 소설은 1962년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돼 더 유명해졌다. 영화는 여주인공 스카우트의 유년기 전반을 조명한 책과 달리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가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흑인 토머스 로빈슨을 변론하는 법정 장면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에게 <앵무새 죽이기>의 이미지는 민권 운동가 애티커스 핀치에 고정돼 있다. 한때 미국에서 아기 이름으로 ‘애티커스’가 유행했고, 로스쿨 진학 열풍도 일어났다고 한다.


<앵무새 죽이기> <파수꾼>의 작가 하퍼 리(89)의 2007년 모습_경향DB


하지만 이번에 출간되는 <파수꾼>에서 애티커스 핀치가 인종차별주의자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며 독자들의 실망이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산타클로스의 실체를 처음 알게 된 어린이들이 느끼는 환멸에 비유된다.

상업주의적인 사전 홍보 전략에 불쾌함을 느낀 사람들 중에는 책을 사보지 않겠다는 이들도 있다. 미시간에 사는 리어나도 말킨은 뉴욕타임스에 보낸 독자 의견에서 “요양원 생활을 하는 89세의 하퍼 리가 이 책의 출간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결정했을지 의문”이라며 “<파수꾼>으로 인해 누군가는 돈을 무척 많이 벌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자고 일어나면 오프라인 서점이 문을 닫는 시대에 출판계와 독서 애호가들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작 출간을 반기는 편이다. 순전히 ‘글쓰기 테크닉’의 관점에서 무명 작가의 습작이 어떻게 베스트셀러로 변모했는지 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견해도 있다.



애초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이 연작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어서 애티커스 핀치의 성격 변화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다만 관점에 따라 6세 소녀가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인종주의자로서 면모를 어른이 되어 새로 발견했다고 할 수도 있고, 나이 든 아버지가 젊은 시절 자신의 태도를 위선으로 여기고 솔직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1960년대의 출판사는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한 반면 55년이 지난 지금 출판사는 인종주의자로서의 원래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업적 고려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책이 더 관심을 끄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주의 논란이 극대화되는 시점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경찰의 법집행 과정에서 흑인 사망 사건이 이어지는가 하면 백인우월주의자의 증오범죄 후 인종차별의 상징 남부연합기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사회는 인종문제와 관련해 과연 어떤 진보를 이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인종문제는 심화되는 불평등, 계급 갈등과 얽히며 1960년대에 비해 훨씬 복잡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동시 출간되는 <파수꾼>이 과연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궁금하다. 오랜 인종차별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 미국은 인종문제에 대한 ‘위선’이라도 있지만, 한국은 대놓고 피부색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는 점에서 그 ‘위선’조차 없는 사회 아닌가.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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