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미국에 번지는 ‘불평등’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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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미국에 번지는 ‘불평등’ 논쟁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12. 19.

식품판매점에서 일하는 조안나 크루스(29)는 연방정부가 정한 최저임금 수준인 시간당 7.30달러(약 7680원)를 받는 싱글맘이다. 주 40시간을 일해도 300달러가 채 안되는 돈을 손에 쥔다. 그는 어머니의 삶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매트리스 공장에서 30년간 일했지만 지금도 시급이 9달러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나에게 잘못이 있지요.” 크루스는 자기 탓을 했다. 청교도, 개인주의 문화에서 별로 이상하지 않은 태도다. “그런데 나는 이미 직업이 있어요. 지금이라도 공부를 시작하면 그걸 마칠 때쯤엔 마흔이 될 거예요. 누가 애 있는 마흔살 여성을 고용하려 하겠어요. 그러니 지금보다 잘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의 삶은 자식들에게도 대물림될 가능성이 높다. 가난의 ‘3대 세습’이다.

이것은 지난 9일 CNN방송이 최저임금 논쟁을 전하며 소개한 사례다. 올라가는 길이 막힌 계급 사다리 아래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이 여성뿐만이 아니다. 이 여성을 보며 나는 2005년 뉴욕타임스의 기획기사 ‘계급이 중요하다(Class Matters)’가 전한 크루스와 비슷한 처지의 싱글맘 앤젤라 휘티커가 다섯 자녀들을 키우며 악착같이 공부해 간호사가 되는 꿈을 이뤘다는 스토리를 떠올렸다. 크루스와 휘티커 사이에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당선, 월가 점령시위 같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엔 건너지 못할 큰 강이 생겨버린 것 같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의 경제학 교수 엠마누엘 사에즈가 분석한 소득 분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상위 10%가 벌어들인 소득은 미국 전체 소득의 절반을 넘는다. 1920년대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미국 뉴욕 맥도널드 매장 앞 패스트푸드 노동자들 최저임금 인상요구 시위 (경향DB)

미국에서 특파원으로 5개월 지내며 공론의 장에서 자주 접한 단어는 불평등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 중산층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말도 불평등이다. 마르틴 루터 킹의 워싱턴대행진 50주년 연설, 넬슨 만델라 추도식 연설에서 그랬다. 지난 4일 미국진보센터(CAP)에서 한 경제적 이동성에 대한 연설은 최저임금에 초점을 맞췄다. 오바마는 “증가하는 불평등과 감소하는 사회적 이동성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도전”이라며 “우리 경제가 모든 노동하는 미국인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을 올리자는 제안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어서 내년 중간선거에 대비해 전략적으로 꺼내든 측면도 있지만, 현재 미국의 불평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카드 같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전면에 나선 이 논쟁은 공화·민주의 타협 정치가 마비된 데다, 현행 최저임금을 받고서라도 일을 하려는 산업예비군들이 줄 서 있다는 강력한 반론에 막혀 거의 진전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은 체념 아니면 미국판 로또인 파워볼 구매다. 파워볼은 최근 몇 회째 1등 당첨자가 나오지 않으며 당첨금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나 크리스마스 즈음엔 10억달러(약 1조52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될 정도로 광풍이 불고 있다. 물론 다른 흐름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건은 부자증세와 무상교육 확대 등 풀뿌리 정당 노동가족당(Working Families Party)의 노선을 채택한 빌 드 블라지오가 세계 자본주의 중심인 뉴욕시장으로 내년 1월1일 취임하는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중 사회주의·사민주의 정당이 없는 예외적인 국가, 미국에서 불평등 논쟁은 좀 다른 식으로 진행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어찌되었든 대통령이 나서 불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미국은 불평등과 삶의 질 문제가 정치적 공론장에서 실종되다시피한 2013년 한국보다는 낫지 않을까.

손제민|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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