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전략적 인내’의 공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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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전략적 인내’의 공모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9. 26.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8년 대선후보 시절 자신이 집권할 경우 적성국 지도자라도 직접 만나 대화하겠다며 예로 든 나라가 넷 있다. 바로 이란, 북한, 시리아, 쿠바다. 오바마는 이들 가운데 적어도 이란 지도자와의 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유엔 총회에서 34년의 적대 끝에 미·이란 정상이 만나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일단 상생의 길 위에 올라선 것 같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출처 :AP연합)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20일 워싱턴포스트에 ‘왜 이란은 건설적 관계맺기를 추구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댓글로 보건대, 로하니의 글은 미국 사람들 사이에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글에 비해 격조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 로하니는 자신이 석 달 전 대외관계 개선 공약으로 광범위하고 대중적 위임을 받아 집권했다는 얘기로 글을 시작했다. 그는 이제 세상이 변해 국제정치는 더 이상 제로섬 게임이나 냉전적 사고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국내정치가 국제정치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상대국에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떤 일을 ‘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미국이 이란 핵문제나 시리아 내전에 접근한 방식은 모두 ‘하지 말라’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란은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핵에너지를 이용하려 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은 미래세대에게 남길 유산을 위해서라도 최근 이란 대선이 마련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하면서 글을 맺었다.


로하니의 의도는 미국 주도의 제재로 경제난이 가중돼 국민들이 힘겨워하는 상황에서 대미관계 개선으로 제재를 완화하려는 데 있다. 미국 당국자들이 오바마 정부 5년간 제재 압박과 대화 노력을 일관되게 한 덕분에 이란이 대화의 장에 미국이 원하는 조건으로 나왔다고 홍보하는 것은 좀 성급한 측면이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이번 유엔 총회에서 로하니를 만나려 하고, 기조연설에서 이란을 가장 많이 언급한 배경에는 임기를 3년여 남겨두고 정권이 남길 유산에 목말라 있는 처지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각종 국내 개혁 의제 추진 경과가 지지부진하고, 내키지 않는 시리아 참전 문제로 고역을 치른 오바마 입장에서 로하니가 뻗은 손은 구원의 손길과도 같았을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출처 :AP연합)


반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김계관, 리용호 등 외교관들을 통해 뻗은 손에 오바마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다. 오바마가 양자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이유는 로하니가 핵무기를 갖지 않겠다는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표한 반면 김정은은 핵실험 등을 통해 보유한 핵무기를 바탕으로 핵보유국 대우를 하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데 있다.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지만 당장 핵무기를 빼앗을 방법도 없기 때문에 ‘전략적 인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있다. 기자가 만나본 미국 당국자와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정말로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지, 협상을 해도 되는 상대인지 의구심을 표했다. 그들은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갑자기 연기하고, 억류된 미국인을 구출하러 가려던 로버트 킹 특사의 방북 초청을 갑자기 철회한 데 대해 북한이 내놓은 이유들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런데 북한은 그들대로 임기를 3년 남겨두고 레임덕 얘기를 듣는 미국의 대통령과 정권의 명운이 걸린 협상을 하는 것이 좋을지 의구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양자는 서로 ‘전략적 인내’의 공모자인지도 모른다. 상대방과 무언가를 도모하려 할수록 국내적 위험부담이 크고, 차라리 서로를 탓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본전을 까먹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60여년 적대한 북한 지도자의 기고문이 미국 언론에 실리는 날은 언제일까.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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