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박 대통령, 외교를 하시지요
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특파원칼럼]박 대통령, 외교를 하시지요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11. 27.

백악관은 이란 핵협상의 잠정합의가 도출된 직후 기자들에게 배포한 설명자료(fact-sheet)에서 이란이 취하기로 한 핵무기 개발 능력 제한 조치를 길게 설명하며, 지난 10년 사이 처음으로 이란 핵 프로그램에 의미있는 제한을 설정한 첫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미국 등이 완화해줄 경제제재는 아주 미미한 규모일 뿐이고 그마저도 이란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다고 했다. ‘팩트’만큼 주관적 평가가 많이 붙은 이 자료를 읽어보면 이번 합의는 곧 미국 외교의 승리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국영방송에 나와 “다른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독해하게 내버려두라. 하지만 이란이 농축할 수 있다는 권리는 합의문에 분명히 기술돼 있다”면서 “나는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의 농축 활동이 예전처럼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발표한다”고 밝혔다. 이 말을 들으면 또 이란이 이긴 것 같다.


외교에서 이상적 합의는 협상에 참여한 외교관들이 각자 귀국해 자국민을 상대로 ‘우리가 이겼다’고 세일즈할 수 있는 합의다. 역시 이번 협상에 참여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 합의에서 이란과 6개 국가들 누구도 패한 쪽은 없으며 모두가 승리했다”고 했다. 무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지 않는 한 외교에서 100 대 0 승리는 있을 수 없다. 51 대 49 정도의 승리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누구의 승리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상반된 입장을 가진 국가의 대표가 만나 도출하게 되는 합의문의 언어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 모호성이 생명이고, 그것은 각자 자국에 돌아가 ‘우리가 이겼다’고 주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번 합의의 대표적 모호성은 이란에 우라늄 농축 권리가 있느냐는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이란 관리들은 하나같이 “농축 권리를 인정받았다”고 했지만,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농축 권리를 인정한 적 없다”고 했다. 이번 협상의 결과문서인 공동행동계획을 보면 그 부분은 “평화적 성격을 담보하는 투명성 조치 및 실제적 한계가 있는 상호 규정된 농축 프로그램”으로 표현돼 있다. 이 말은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게 확실하다면 제한된 규모의 농축을 막지 않는다는 얘기로 들린다. 이스라엘과 미국 의회가 나쁜 합의라고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케리 장관은 “협상은 환상의 예술 또는 이상적인 예술이 아니라 가능성의 예술이다. 그 가능성은 이스라엘과 중동지역을 좀 더 안전하게 해줄 수 있는 검증 가능하고 분명한 능력”이라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이 협상하겠다고 나오는 기회를 놓쳐 핵무기를 만드는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과 지금 핵능력을 동결·후퇴시켜 핵개발 시간을 늦추고 그 사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 중 어떤 것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안전을 위해 더 좋은지를 묻고 있다.


손잡은 미·이란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모함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이 24일 새벽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란 핵 협상을 타결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제네바 _ 출처: 로이터연합뉴스


이란이 북한의 전철을 밟아 결국 핵개발을 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많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번 합의가 북한을 다른 길로 인도할 가능성도 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앞으로가 중요할 것이다. 미·이란 지도부가 각자 국내적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협상을 밀고 나갈 수 있을지도 분명치 않다. 잘되면 업적이 되지만, 잘되지 못하면 두고두고 욕먹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제3자 입장에서 이번 합의의 미덕은 정말 오랜만에 외교관들이 밥값을 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북핵 문제는 물론이고 한·일관계에서도 외교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미·이란이 한 것처럼 비밀외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내 눈에 외교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포린폴리시에 기고할 정도로 외교를 잘 아는 대통령이다. 군인들뿐만 아니라 외교관들에게도 본연의 임무를 맡겨주고 밥값을 하게 해주길 바란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