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미국 NSA와 ‘기게스의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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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미국 NSA와 ‘기게스의 반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11. 6.

기게스(Gyges)는 리디아의 왕을 섬기던 목동이었다. 어느 날 지진으로 갈라진 땅 틈에서 발견한 반지를 끼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에는 남의 눈을 의식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유혹해 간통하고, 왕을 죽인 뒤 자신이 왕에 올랐다. 글라우콘은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이 얘기를 들려준 뒤 질문했다. 이런 반지가 두 개 있어서 하나는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 글라우콘의 예상 답안은 그런 반지를 갖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통신감청 정보기관 국가안보국(NSA)의 자국 시민과 우방국 정상들에 대한 무차별적 도·감청 논란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이다. 정보기관은 ‘음지’에서 일한다고들 한다. 분명히 존재한다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발각되지만 않으면 마치 없는 것인 양 시치미 떼는 것이 정보기관의 활동이다. 정보기관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법을 위반해서라도 정보를 빼오도록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 국가기구이다. 그런 정보기관 종사자들 입장에서 기게스의 반지는 꿈의 실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실제로 기게스의 반지를 손에 넣은 정보기관이 있다면 바로 미국 국가안보국이 아닐까 싶다. 국가안보국은 누구나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쓰는 시대에 길목을 차지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주고받는 전화통화와 e메일, 인터넷 접속 기록을 엿보는 식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정보 수집 대상국 (출처 : 경향DB)


우방국 정상들을 비롯한 국내외 요주의 인물의 통신활동을 감시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들은 테러리즘 방지뿐만 아니라 백악관, 국방부, 국무부, 국토안보부 고위 정책 관리자들의 결정에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고 국가안보국은 강조하고 있다. 세상에 들키지만 않았다면 미국 정부 관리들은 기게스의 반지가 제공하는 정보 우위에 안존했을 것이다. 하지만 테러리즘을 막기 위해, 국가안보를 위해 그 많은 정보가 다 필요하다는 국가안보국의 주장은 테러리즘이나 국가안보와 직접적으로 무관한 우방국 정상과 무고한 자국 시민을 감시했다는 증거들 앞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는 것 같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다고 여기는 미국민들과, 신뢰를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우방국들에 둘러싸여 미국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국가안보국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동맹국 정상까지 감시했다는 등의 폭로가 이어지자 국가안보국 개혁을 다짐하면서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미국 정보기관이 다른 나라 정보기관들에 비해 우수한 기술적 능력을 갖췄다는 미국 ‘정보 커뮤니티’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의 한 외교관은 “외국 정상 도·감청은 다른 나라도 다들 하고 싶어하지만 능력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게스의 반지는 권력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여전히 누구나 선망하는 대상인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도전적인 물음에 고민하다 결국 이런 답을 내놨다. ‘반지의 힘을 남용한 사람은 그 스스로를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 만든 반면, 그 반지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사람은 여전히 이성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며 결국 행복하게 살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보기관의 위상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미국 국가안보국 논란과 기게스의 반지를 떠올리며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또 미국의 세기가 저물어간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이즈음에 미국 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진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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