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원자력협정의 위험한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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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특파원칼럼]원자력협정의 위험한 접근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8. 1.

유신모 워싱턴 특파원 simon@kyunghyang.com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에너지 안보와 원자력 산업, 그리고 외교적 측면에서 한국에 커다란 고비이자 난관이다. 한국은 원자력 산업 규모에 맞는 새로운 협정이 필요하지만 핵확산 문제를 우려하는 미국과 이견을 보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심각한 충돌이 불가피하다.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의 핵심은 핵연료 제조를 위한 우라늄농축과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문제다. 한국은 농축·재처리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국은 기본적으로 외국과의 원자력협정에서 농축·재처리는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미국 내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돌을 피할 길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2009년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으면서 농축·재처리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다. 당시 미 국무부는 이 같은 ‘UAE 방식’을 ‘골드스탠더드(황금기준)’라고 표현하면서 향후 외국과의 협정에서 이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향신문DB)


그러나 지난 1월 대니얼 포네먼 미 에너지부 부장관과 엘렌 타우셔 당시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은 의회에 서한을 보내 “UAE 방식은 행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된 것이 아니며 국가에 따라 선별 적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회와 비확산주의자들이 이에 즉각 반발하면서 논란이 촉발됐다. 의회는 외국과의 원자력협정에서 농축·재처리를 금지할 수 있도록 의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현재 UAE 방식을 공식정책으로 채택할지 여부는 에너지부·국무부·백악관 관계자들이 모인 ‘인터에이전시’에서 여전히 논의 중이다.


이 같은 미국 내 상황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농축·재처리를 무조건 금지하는 것은 각국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미국 원자력 산업계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것을 미국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손발을 묶는 핵협정을 외국에 강요함으로써 러시아·중국 등에 세계 원전시장을 뺏기게 되면 미국이 원하는 비확산체제 유지에도 결코 이롭지 않다. 이를 근거로 미국을 설득할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제기되는 주장은 영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농축·재처리를 국가 주권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국민 감정을 자극하는 주장이 횡행한다. 또 파이로프로세싱(사용후 핵연료 건식처리)과 국내 농축활동 확보가 주권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세다. 


농축·재처리 권리를 얻는 것 자체가 원자력협정 개정의 목표는 아니다. 지금 한국에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핵연료 공급과 사용후 핵연료의 처분 방안을 확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파이로프로세싱으로는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직접 농축을 하는 것이 핵연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데도 굳이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한 파이로프로세싱만을 고집하고, 핵연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 데도 굳이 농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핵물질 전용에 대한 미국의 의심만 키울 뿐이다. 


원자력협정을 핵주권의 문제로 접근하고 안보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북한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이는 협상을 어렵게 만들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해 한·미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정말로 핵무기를 가질 생각이 아니라면 타협을 통해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기 위해 원자력계는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하고, 언론은 조금 더 진지해져야 하며, 정부는 조금 더 냉철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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